격동의 시대를 살아간 한 기회주의자의 성공과 예견된
몰락을 통해 변신과 처세를 요구하는 우리 세대를 되돌아본다
소설 <꺼삐딴 리>의 주인공 이인국은 일제시대 제국대학 의학부를 수석으로 졸업한 외과의사이다. 일본 관리들을 주로 상대하면서 철저한 친일파로 성공한 그는 일본인 행세에 앞장선다. 그러나 해방이 되고 북쪽에 소련군이 진주하게 되자, 민족과 조국을 배반했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혀 총살의 위협을 받게 된다. 위기의 상황에 잘 적응하는 이인국은 입을 다문 채, 누군가가 감방 안에 버리고 간 러시아어 회화책을 공부한다. 때마침 감방 안에 전염병이 돌자 의사인 이인국은 감방에서 풀려나와 환자를 돌보게 되며, 그 사이에 소련군 장교와도 안면을 익히게 된다. 그리고 소련군 장교의 얼굴에 붙은 혹을 수술해 줌으로써 궁지에서 벗어난다. ‘꺼삐딴 리’라는 명칭은 소련군 장교에게 얻은 것이다. 그 후 전쟁이 터지고, 이인국은 1·4 후퇴 때 가방 하나만 챙겨 들고 월남하여, 서울 수복 후에는 어엿한 종합병원장 행세까지 하게 된다. 피난 때 죽은 아내 대신 젊은 간호사와 재혼한 이인국은 전처 소생의 딸을 미국으로 유학 보낸다. 그런데 그 딸이 미국인과 결혼하겠다고 통보하자 이인국은 고심 끝에 미국행을 결심한다.
그는 “그 사마귀 같은 일본놈들 틈에서도 살았고, 닥싸귀 같은 로스케 속에서도 살았는데 양키라고 다를까…… 혁명이 일겠으면 일구, 나라가 바뀌겠으면 바뀌구. 아직 이 이인국의 살 구멍은 막히지 않았다”고 위로하면서 미국 여행을 준비한다.
소설 <나신>은 전쟁이 끝난 후의 혼란된 사회상과 세태의 변화를 비판적 안목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 오은애는 세 끼의 밥과 동생의 학비와 어머니의 약값을 구하기 위해 대학을 중퇴하고 비어홀의 여급으로 일하게 된다. 그녀는 어느 날 미 군수 물자를 취급하는 단골손님 한식에게 순결을 뺏기고 임신하게 된다. 생활의 곤궁과 자신의 떳떳하지 못한 직업 때문에 고민에 빠져 있던 오은애는 기지촌의 한식을 찾아간다. 한식은 의외로 성실하게 오은애를 맞아들인다. 그러나 이러한 새로운 삶이 제대로 꽃을 피우기도 전에 병석에 누워 있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게 되고, 한식도 군수 물자를 불법 취급했다는 이유로 미군 부대에 끌려간다. 오은애는 한식의 면회를 갔다가 미군 부대의 철조망 근처에서 미군의 총에 맞아 부상까지 당하게 된다. 한식이 풀려나오던 날, 두 사람은 더욱 굳세게 살아나갈 것을 다짐한다.
이 소설의 주인공들이 보여 주고 있는 개인적 운명은 그 성격에서 연유된 것이 아니라 전후의 궁핍한 현실 속에서 빚어진 것이다. 육체를 수단으로 삼아 돈을 벌지 않으면 안 되는 오은애와 그녀의 친구 미숙, 미군의 쓰레기통을 뒤지며 살아야 하는 한식 등의 삶은 모두 당대적 현실 상황 속에서 문제적인 상태로 노출되고 있다. 작가는 비어홀의 여급으로 전락하는 주인공을 통해 전후 현실의 세태를 추적하면서 그 관심을 기지촌의 비리와 병폐를 직시하는 데에까지 확대시킨다.
저자는 냉철한 사실적 시선을 바탕으로 현실의 부조리를 고발하면서 인간의 존엄성과 끈질긴 생명력을 추구하려는 일관된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또한 현장 답사를 거친 작품 소재의 충분한 소화로 분단의 비극과 우리나라가 처한 정치. 경제. 문화적 상황을 등장인물을 통하여 형상화하고 있다.
저자
전광용
1919년 함경남도 북청에서 태어나 경성고등상업학교를 거쳐 서울대 국문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서울대 국문과 교수로 재직했다. 195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흑산도>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온 그는 1962년 <꺼삐딴 리>로 동인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이후 30여 편에 이르는 작품을 발표하고 1989년 7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작품은 혼란의 현대사를 살아가는 지식인의 내면세계를 객관적으로 형상화하고 부조리한 현실을 날카롭게 꼬집고 있어, 빈약한 한국 풍자 문학의 한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평을 얻었다. 주요 작품으로는 <흑산도>, <꺼삐딴 리>, <의고당실기>, <태백산맥>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