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 졸라의 캐치프레이즈인 자연주의는 발자크, 스탕달, 플로베르로 이어진 사실주의 전통을 한층 더 극대화한 것이다. 사실주의와 자연주의 사이에는 과학, 특히 생리학의 괄목할 만한 발전이 있었고, 이에 작가들은 과학이 일구어 낸 방법론과 성과를 문학에 차용하고자 했다. 말하자면 자연주의는 실증주의 정신, 과학과 진보에 대한 믿음이 부여한 진리의 미학이라 할 수 있다. 졸라는 1865년부터 이 용어를 자신의 것으로 사용했다. 그는 소설가는 인간에 대한 체계적이고 철저하고 방대한 과학적 탐구에 참여해야 하고, 그 탐색의 장은 현실 전체가 되며, 여기에 금기되는 주제는 있을 수 없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자연주의는 정상적인 것의 변두리, 예컨대 위험한 계급, 노동자, 퇴화, 히스테리, 신경증, 질병, 광기 등 육체나 사회에 무질서를 일으키는 모든 요소에 관심을 기울였다. 졸라는 자연 과학적 방법을 빌려 한 사회 속에서 열정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파악하게 되면 적어도 그것을 최대한 억제하거나 비공격적으로 만들 수 있다고 믿었다. 요컨대 사물들의 원인을 꿰뚫고 그것을 기계적인 메커니즘으로 인식함으로써 철저하게 제어하려는 생리학자의 꿈은 곧 자연적, 사회적 연구에 그러한 실험 방법을 적용하려는 소설가의 꿈이기도 한 것이었다.
졸라는 이러한 사상적 토대 위에서 발자크의 『인간극』에 필적하는 작품을 쓰겠다는 방대한 계획을 세웠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루공-마카르 가』 시리즈로, 졸라 문학의 정수라 할 수 있다. 총 20편으로 구성된 이 시리즈는 정통 혈통인 루공 가와 사생아 혈통인 마카르 가가 여러 대에 걸쳐 사회 여러 분야로 퍼져 나가는 양상을 그린 것으로, 여기에는 증시, 토목, 도시의 발전, 백화점의 등장, 철도망의 확장, 토지 개혁 문제, 기계의 발달, 자본과 노동의 투쟁, 노동자의 삶, 종교, 교육, 법 질서, 억압, 검열, 섹스, 예술, 군중, 권력, 욕망 등 시대의 온갖 문제가 총망라되어 있다. 그것은 가히 19세기 후반 프랑스 사회에 대한 총체적인 기록이라 할 수 있다. 국내 처음으로 소개되는 작품인 『꿈』은 『루공-마카르 가』 시리즈의 열여섯 번째 소설이다. ‘앙젤리크’라는 한 고아 소녀가 경험하는 환영 같고 슬픈 사랑 이야기를 담은 것으로, 작품 전반에 걸쳐 원시 카톨릭 교회의 신비주의적 색채가 주조를 이룬다는 점에서 『루공-마카르 가』 시리즈에서도 예외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대략의 줄거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860년 혹독한 겨울바람이 부는 어느 아침, 사제복 제조 장인인 위베르 부부는 보몽의 성당 문 아래에서 밤새 추위에 떨고 있던 한 아이를 발견한다. 그 아이에 관해 알려 주는 것이라고는 일련번호가 매겨져 있는 빈민 구제 사무국의 아동 기록부가 전부로, 그 속에는 아이의 이름이 ‘앙젤리크’라는 사실 외에는 부모의 이름조차 없었다. 그러나 이렇게 버림 받은 앙젤리크에게는 사실 행실이 나쁜 한 여인에게서 났다는 출생의 비밀이 있었다. 자식이 없었던 위베르 부부는 앙젤리크를 거두어 기르기로 하고, 아이에게 사제복에 수놓는 일을 가르쳤다. 아이는 능숙하게 자수 공예 기술을 익혀 갔다. 앙젤리크가 살게 된 위베르 부부의 집은 성당 몸체에 붙어 있었는데, 세상에서 멀리 떨어진 그곳에서의 삶은 수도원에서 사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앙젤리크는 일요일 아침 미사를 보기 위해서만 외출했으며, 위베르틴은 아이가 혹 나쁜 아이들과 사귈까 봐 학교에도 보내지 않았다. 그 집이 만들어 준 너무도 고요한 환경과 일상적인 노동, 규칙적인 삶, 그리고 위베르 부부의 애정 어린 보살핌 덕분으로 유전으로 물려받은 앙젤리크 거친 기질은 서서히 순화되어 갔다. 앙젤리크가 특히 열광한 것은 『황금빛 전설』에 나오는 성인들의 이야기였다. 그러던 중 앙젤리크는 성당 그림 유리창 수선공인 펠리시앵을 만나 사랑을 하게 된다. 펠리시앵은 실은 장 오트쾨르 주교의 아들이었다. 둘의 사랑은 양쪽 부모의 반대에 부딪히고, 이에 지친 앙젤리크는 끝내 병이 들고 만다. 그런 앙젤리크를 보면서 부모들은 둘의 결혼을 허락한다. 그러나 결혼식이 끝날 무렵 앙젤리크의 생명도 꿈의 황홀경 속에서 꺼지고 만다.
졸라는 이 소설을 준비하면서 자신의 관점을 이렇게 설명했다. “나는 이 시리즈 속에서 저 너머 미지의 세계를 오직 우리 육체의 물질성 속에 담겨 있기는 하지만 우리가 알지 못할 뿐인 어떤 힘의 효과로서만 인정할 뿐이다. 앙젤리크는 자신이 미처 깨닫지 못한 욕망에서 자양분을 얻은 상상력으로 저 너머의 세계를 지어 내고, 자신을 스스로 그 속에 가두었다. 결국 세계를 만들어 내는 것은 우리 자신이고, 모든 것은 우리에게서 출발하여 다시 되돌아온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꿈』은 저 너머 미지의 세계에 대한 질문과, 신앙과 기도로 점철된 고요한 삶에 대한 이끌림과, 우리 내면에 도사린 힘의 효과라 할 수 있는 초자연적 믿음, 그리고 그러한 것에 대한 합리적이고 유물론적인 설명이 한데 어울려 구성된 작품이다. 졸라는 앙젤리크의 꿈을 정당화하는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풍부한 자료 수집을 통해 중세적 건축과 성인들의 이야기와 종교 의식을 묘사했고, 또한 그녀의 운명을 설득력 있게 그리기 위해 수백 년간 삶이 정지해 버린 한 지방 소도시를 배경으로 삼았다. 그리고 그녀의 직업으로 이미 그 의미가 쇠퇴해 버린, 성직자의 제례 의복에 수놓는 일을 선택했다. 이를 통해 이 작품은 교육과 환경과 유전 간의 메커니즘으로 한 인간의 삶을 설명하려는 자연주의의 관점에 충실한 구성을 갖추게 되었다.
저자
에밀 졸라
1840년 파리에서 태어난 에밀 졸라는 19세기 후반 자연주의를 대표하는 작가로서 ‘현실의 충실한 서기(書記)’로 불렸다. 대학 입학 자격시험에서 두 번이나 떨어진 그는 1862년부터 아셰트 출판사에서 일하면서 문학과 예술에 관한 글을 신문에 기고했다. 그 후 집필에 전념하기 위해 출판사를 떠난 그는 1867년에 첫 번째 걸작이라 할 수 있는 『테레즈 라캥』을 내놓았다. 이 무렵 그는 유전과 생리학에 관한 글을 읽으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졸라는 과학적 결정론의 토대 위에 19세기 후반 프랑스 사회에 대한 방대한 문학적 벽화를 그려 나갔다. 그것이 『루공-마카르 가』 시리즈다. “제2제정 시대 하 한 가족의 자연적 사회적 역사”라는 부제가 말해 주듯 시대의 온갖 문제가 총망라되어 있다.
한편 졸라를 말할 때면 단연 드레퓌스 사건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 서한인 「나는 고발한다」에서 이 사건의 추악한 이면을 폭로함으로써 프랑스 전역을 들끓게 했다. 이로 인해 그는 군부에 대한 명예 훼손 혐의로 끝내 정치적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 그러나 끈질긴 투쟁 끝에 1898년 드레퓌스가 무혐의로 풀려나고 졸라 역시 파리로 돌아옴으로써 사건은 막을 내렸다. 정의와 양심의 승리를 확인시켜 준 이 사건은 1902년 졸라의 손에 의해 『진실』이라는 작품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러나 그는 이 작품 집필을 마친 뒤 얼마 되지 않아 의문의 가스 질식사로 눈을 감았다.
대표작으로 『테레즈 라캥』을 비롯해 『목로주점』, 『제르미날』, 『작품』, 『나나』 등을 포함한 『루공-마카르 가』 시리즈, 그리고 세기말 종교적·철학적·사회적 결산을 담은 『세 도시』 시리즈와 새로운 사회 구축의 뜻을 담은 『네 복음서』 시리즈 등이 있다. 또한 그는 미술 비평에서도 뛰어났으며, 특히 인상파 화가들을 열렬히 지지했다.
역자
최애영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프랑스 파리8대학에서 정신 분석 문학 비평을 전공했고, 「알랭 로브그리예의 소설 『엿보는 자』의 글쓰기와 읽기에 있어서의 무의식의 자리(La place de l'inconscient dans l'écriture et la lecture du Voyeur d'Alain Robbe-Grillet)」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HK한국문화연구단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Le Voyeur à l'écoute(PUF, 1996)가 있고, 그 밖에도 프랑스 문학 관련 연구 논문과 정신 분석 문학 비평 이론과 한국 문학 작품에 관한 평론이 다수 있다. 옮긴 책으로는 『아프리카인』, 『칼 같은 글쓰기』, 『사랑에 빠진 악마』, 『문학 텍스트의 정신 분석』(공역) 등이 있다. 한편 이인성의 『낯선 시간 속으로』와 정영문의 『검은 이야기 사슬』 등을 프랑스어로 옮기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