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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용시선

정지용

172쪽, A5, 9,000원

2006년 08월 30일

ISBN. 89-324-7108-8

이 도서의 판매처

시인과 작품세계 모두 6부로 구성된 <지용시선>에는 제1부에서 4부까지 <지용시집>에서 선한 14편과 제 5부와 6부에 <백록담>에서 선한 11편을 합한 25편이 수록되어 있다. 특징적인 것은 초기의 실험적인 작품이 대부분 제외된 반면에 제4부에 가톨릭 체험을 소재로 한 신앙시편 5편 모두를 수록하였다는 점이다. 아마도 신앙시편이 그 자신의 정신적인 구심점이었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을 강조한 선택이라고 여겨진다. 오늘의 관점에서 보아도 정지용시의 전모를 파악하는데 크게 무리 없는 선정이지만 후일 명편으로 평가되는 <바다 2>, <구성동>, <비> 등이 제외된 것은 해방 직후의 혼란의 와중에서 감각적 새로움보다는 자기 체험의 구체성과 자신의 심적 안정을 주안으로 선한 것으로 판단된다. ‘언어 예술’로서의 시 정지용은 한국 현대시사에서 ‘언어에 대한 자각’을 실천한 최초의 시인으로 평가된다. 1920년대 대부분의 시인들의 시가 과도한 감정의 분출에 의해 씌어지던 것에 비해, 정지용은 감정을 이지적으로 절제시켜 이미지로 표현하는 새로운 시법을 정착하는 데 기여한다. 그가 ?시와 언어?에서 “시의 신비는 언어의 신비다. 시는 언어와 Incarnation적 일치다. 그러므로 시의 정신적 심도는 필연적으로 언어의 정령을 잡지 않고서는 표현 제작에 오를 수 없다”라고 한 것처럼 언어에 대한 그의 자각은 남다른 것이었다. 모던한 감각과 시적 재기 휘문고보 재학시부터 일본 유학시절까지의 지용의 초기 시는 단순한 회화성을 넘어서 동적인 율조까지 배려한 감각적인 언어구사의 정수를 보여준다. 1923년 5월 경도(京都)의 도시샤(同志社)대학에 입학한 정지용은 새로운 문물과 세계를 보았을 것이다. 특히 빈곤한 가정환경과 유학생이라는 신분적 괴리와 동시에 식민지배하에 있는 조선 출신의 유학생이라는 것에 이중의 압박감을 가졌을 것이라 짐작된다. 정지용의 첫 발표작인 <카페·프란스>(『학조』1926. 6)는 이와 같은 상황에서 일본에 유학하면서 서구를 동경하는 젊은 청년들의 복합적인 자의식을 모던한 감각으로 표현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관심의 대상이 된다. 또한 이 시에서 지용은 다다이즘적 형식 실험도 하고 있는데 문장부호의 사용이나 활자의 다양한 배치 등 당시 문단에서 유행하던 실험적인 시 형식이 시도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실험적인 시도는 단시간에 극복되어「향수」(『조선지광』65호, 1927. 3)와 「유리창 1」(『조선지광』89호, 1930. 1) 등의 시편을 통해 정지용 자신만의 독자적인 시의 길을 개척하였다. 오늘날까지 널리 알려진 국민적 애송시이자 정지용의 초기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향수>는 일본 유학시절 고향을 그리는 절절한 마음을 탁월하게 형상화한 작품으로 성가가 높다. 이 시는 언어의 뛰어난 조탁과 절묘한 이미지 구사 그리고 음악적 율조미 등으로 인하여 독자로 하여금 자기도 모르게 향수에 젖어들게 만드는 마력을 가지고 있다.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과 “엷은 졸음에 겨운” 그리고 매연에 반복되는 후렴구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등의 다양한 언어들이 어우러져 시적 효과를 드높이고 있다. <향수>에 비하여 조형적 회화성이 두드러져 보이는 <유리창 1>은 박용철에 의하면 아들을 잃은 슬픔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1920년대 슬픔의 시와 다른 1930년대 모더니즘의 시적 감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 시에서 지용이 동시대의 시인들과 구별되는 차이를 보여주는 것은 이미지의 조형능력이다. 1920년대 시인들처럼 슬픔의 정서를 문면에 그대로 노출하거나 리듬에 실어 시적정서를 표현하지 않고 차고 단단한 물질적 이미지로 언어화시켜 보여주고 있다. 특히 “물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박힌다”고 하여 투명하고 단단한 결정체로 슬픔의 감정을 구체화한 것은 지용이 보여준 남다른 시법이다. 견인의 정신과 산수시 1935년 첫 시집 <정지용시집>을 간행한 후 자신의 시적 위치를 확고히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지용은 상당기간 침묵을 지키는데 이는 새로운 시적 변신을 위한 모색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이는 감각에서 정신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며 ‘바다의 시편’에서 ‘산의 시편’으로 나아가는 자기 모색과 침잠의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시를 육화된 언어의 등가물로 인식한 것에는 변함이 없으나, 첫 시집 <정지용시집>의 상당수 시가 ‘바다’를 제재로 하는 반면, 제2시집 <백록담>의 수록 시들은 ‘산’의 심상에 경도되어 있기 때문이다. ‘바다’에서 ‘산’으로의 뚜렷한 변모를 보이는 정지용 시의 제재는 연속적인 흐름과 방향을 나타내기 때문에 그의 시적 변모를 해명할 수 있는 유력한 근거가 된다. 1926년부터 1935년까지의 시, 곧 ‘바다의 시’가 언어의 기교를 위주로 하는 것임에 비해 산을 제재로 하는 1935년 이후 1941년까지의 시, 즉 “산의 시”에서는 정신성이 두드러진다. 특히 이 시기의 시는 동양적인 관조의 세계를 드러내면서 고요하고 단아한 정취를 자아낸다. 정지용의 시에서 산이나 자연은 단순한 공간적 배경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극기적 정신성을 함축한 대상이다. 금강산을 등반하고 씌어진 <옥류동>(『조광』25호, 1937. 11), <비로봉>(『청색』2호, 1938. 8), <구성동>(『청색』2호, 1938. 8) 그리고 등산 체험이 바탕이 된 <장수산>(『문장』2호, 1939. 2), <백록담>(『문장』3호, 1939. 4) 등은 이 시기 지용이 시에서 추구한 정신주의적 지향성을 짐작하게 한다. <백록담> 이후 2년여의 침묵을 지키던 정지용은 1941년 1월 <조찬>, <비>, <인동차> 등의 신작시 10편을 발표하고 같은 해 9월 제2시집 <백록담>을 간행하게 된다. <백록담>은 모두 1935년 이후에 발표한 시편을 묶은 것이다. <백록담>에 수록된 대부분의 작품들은 형식적으로는 산문성을 시도하면서 내용적으로는 앞에 인용한 것처럼 동양적 정신의 구경(究竟)을 추구한다. 그것은 세속을 버리고 산수자연에 은거하면서 은일의 정신을 추구한 동양적 산수시의 세계이며 인간과 자연이 구극의 경지에서 일체화하는 자족의 세계일 것이다. 이는 초기의 감각적인 서정시로부터 벗어나, 파국으로 치닫던 식민지 질서의 파행성에 영합하지 않고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정신적인 견인의 고투를 함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정지용의 시는 여러 차례 변모를 겪으면서도 일관되게 언어의 기능성을 최대한도로 실현해 보였으며 그는 감성의 지적인 표출에 있어 현대시의 선두주자로서 새로운 경지를 개척해 놓았다. 또한 정지용은 1939년 「문장」의 편집위원으로 활약하면서 많은 시인들을 등단시켰다. 이상의 시를 「카톨릭청년」에 소개하고, 조지훈·박두진·박목월을 「문장」지를 통해 추천하였으며, 해방 후 윤동주의 저항시를 「경향신문」에 소개하고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간행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함으로써, 이상의 서구적 근대 감각, 청록파 시인들의 전통적 서정의 감각, 그리고 윤동주가 지향한 저항시적 감각 등의 다양한 시적 감각들이 우리 시문학사에 주류적 흐름으로 자리매김 하는 데 공헌하였다. 이로써 그가 추구한 시와 언어의 육화라는 목표는 이후 20세기 한국 현대시의 결정적인 이정표가 되어왔다. 지용이『지용시선』을 간행한 이후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발발하였고 그로 인해 지용은 납북되었다. 1988년 납·월북작가에 대한 정부당국의 해금조치가 있을 때까지 40여 년간 지용은 공식적으로 한국문단에서 자취를 감추게 되었으니 실로 민족의 비극이자 문학의 비극이요 인간의 비극이라고 할 것이다. 20세기 최고의 시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지칭되는 정지용이 본격적으로 연구되고 일반 독자에게도 다시 읽히기 시작한 것은 1988년 해금조치 이후의 일이다. 민족분단으로 인해 문학도 분단되어 있었던 것이다. 앞으로 정지용보다 더 화려한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시인은 출현할 수 있다. 그러나 정지용이 20세기 한국 현대시사에 미친 것과 같이 깊고 넓은 문학사적 의미를 갖는 시인은 쉽게 탄생하기 어려울 것이다. 20세기가 전반의 식민지시대 그리고 후반의 분단시대를 살아야 했던 까닭에 한국인들 그중에서도 특히 지용이 겪어야 했던 인간적 고뇌와 비극은 남다른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차지한 문학적 위엄은 그가 윤동주를 논하면서 말한 ‘약육강골(弱肉强骨)’의 것으로 우리 문학사에 영원히 기록될 것이다.
1
유리창琉璃窓
난초蘭草
촉불과 손
해협海峽

2
석류
발열發熱
향수鄕愁

3
춘설春雪
고향故鄕

4
불사조不死鳥
나무
다른 하늘
또 하나 다른 태양太陽
임종臨終

5
장수산長壽山 1
장수산長壽山 2
백록담白鹿潭
옥류동玉流洞
인동차忍冬茶
폭포瀑布
나비
진달래
꽃과 벗

6
노인老人과 꽃
꾀꼬리와 국화菊花

□ 해설 - 정지용의 시세계와 문학사적 의미

저자

정지용

정지용(鄭芝溶)은 1902년 충북 옥천에서 태어났으며 1923년 휘문학교를 졸업하고 이후 일본 도시샤(同志社)대학에서 유학하던 중 1926년 「학조」라는 잡지에 <카페·프란스>로 등단하였다. 「근대풍경」이라는 일본 문예지에도 정식으로 등단하여 조선 문단에서 일찍부터 주목을 받았다. 1929년 귀국한 후 모교인 휘문학교와 이화여전에서 교편을 잡았다. 1930년에 「시문학」동인으로 본격적인 문단활동을 전개하였다. 시집으로 <정지용시집>(1935)과 <백록담>(1941), <지용시선>(1946)이 있고, <지용문학독본>(1949)과 <산문(부역시)>(1949) 등 두 권의 산문집을 남겼다. 한국 전쟁 중 납북되어 이후 행적은 알지 못하나 북한이 최근 발간한 <조선대백과사전>에 1950년 9월 25일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