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의도 : 지금 왜 <논어>인가? 16세기 <논어언해>가 우리말로 번역된 이래로 정확한 통계를 낼 수는 없지만 현재 시중에 출판된 <논어>의 우리말 번역본은 대략 160여 종에 이르고, 절판된 책까지 합치면 300여 종이 넘는다고 한다. 그리고 일본의 학자 하야시 다이스케(林泰輔) 박사가 편찬한 <논어연보(論語年譜)>에 수록된 역대 <논어>와 관련된 책은 3,000여 종에 이른다. 도대체 <논어>에 어떤 매력이 있기에 이처럼 오랜 시간 동안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것일까? <논어>를 단순히 공자라는 한 개인의 어록으로 보거나 유가의 사상을 집대성한 책 정도로 판단한다면 이러한 현상은 선뜻 이해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논어>는 개인과 시대의 차원을 뛰어넘어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를 담고 있는 바이블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때문에 시대를 초월하여 많은 유가의 경전들 중에서도 한나라 이래로 지식인들의 손을 떠나지 않았다. 사상가로서의 공자를 이해하고, 유가의 참된 정신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그 출발은 바로 <논어>가 되어야 할 것이며, 이를 바탕으로 인류의 보편성을 찾을 수 있는 끝도 바로 <논어>가 되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논어>는 우리의 삶을 이해하는 처음이자 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반드시 <논어>이어야만 하는가? 1960년대 이후로 동양철학에서는 회자되기 시작한 ‘아시아적 가치’라는 말은 물질문명으로 대표되는 서구 사상의 한계와 이것을 대체할 수 있는 정신문명으로서의 동양적 가치에 대한 갈구를 잘 나타낸다. 우리는 동양적 가치의 중심에 바로 <논어>가 있다고 본다. 공자가 추구했던 인간에 대한 인(仁)과 덕(德)은 물질적 문명으로 인해 병든 우리 사회를 치유할 수 있는 대안이 될 것이다.
▶공자, 그는 누구인가? 공자의 이름은 구(丘), 자는 중니(仲尼)로, 일설에는 노나라 양공(襄公) 21년에 태어났다고 하고, 노나라 양공 22년(<사기(史記)> ?공자세가(孔子世家)?)에 태어났다는 주장도 있다. 노나라 창평향(昌平鄕) 추읍(?邑)에서 태어나 노나라 애공(哀公) 16년(BC 479년)에 죽었으니 향년 72세였다. 공자 스스로 “이름은 구이고, 은나라 사람이다”라고 했으니, 그가 은나라의 후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를 멸하고 은나라의 미자계(微子啓)를 송나라에 봉했는데, 공자의 조상인 공보가(孔父嘉)가 바로 송나라의 종실(宗室)이다. 그러나 송나라 시조(始祖)와는 이미 다섯 대 이상의 시간적 차이 때문에 공씨(孔氏)로 성을 바꾸었고, 후에 화보독(華父督)에 의해 무고하게 살해당했다. <사기> ?공자세가 ? 색은(孔子世家 ? 索隱)?에 의하면, 공보가의 후손인 방숙(防叔)이 화보독의 핍박을 두려워하여 노나라로 도망쳐왔고, 방숙이 백하(伯夏)를 낳았으며 백하가 숙량흘(叔梁紇)을 낳았으니, 그가 바로 공자의 부친이라고 한다. 공자는 어린 시절 늘 궁핍한 생활을 하였고, 한때 창고지기나 가축을 먹이는 승전(乘田)이라는 직책으로 일을 하기도 했다. 이처럼 불우한 생활 속에서도 배움에 대한 열의가 있어 소년기에 육예(六藝)를 익혔고 30세에 예악을 완성하였다. 공자 스스로의 말처럼 포부가 매우 커서 “늙은이를 편하도록 하고, 친구가 나를 신임하도록 하며, 젊은이들이 나를 생각하도록”하려고 했지만, 노나라에서는 그의 뜻을 제대로 펼치지 못했고, 56세에 제자들을 거느리고 진(晉)나라, 채(蔡)나라, 위(衛)나라 등지에서 약 12년 동안 머무르게 된다. 이 기간 동안 여러 임금을 찾아서 자신이 갖고 있던 포부를 펼치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크게 중용되지는 못했다. 말년에는 결국 노나라로 돌아와 여생의 대부분을 교육과 고대 문헌 정리에 쏟았는데, 그가 후대에 남긴 가장 큰 공헌도 역시 여기에 있다.
▶왜 <논어>라 하였는가? <논어>는 공자의 언행을 기록한 책으로, 일부 공자 제자들의 언행도 적고 있다. 반고(班固)의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논어>는 공자가 제자나 그 당시 사람에게 응답하거나 제자들이 서로 말하거나 공자의 말을 전해들은 것이다. 당시 제자들은 각기 기록한 것이 있었으니, 스승이 죽자 문인(門人)들이 그것을 서로 모아서 논찬하였으므로, <논어>라고 했다. <문선(文選)> ?변명론(辯命論)? 주석에서 <부자(傅子)>를 인용하여 역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옛날 중니가 죽고, 중니의 제자들이 공자의 말을 좇아 논의하니, 그것을 <논어>라고 한다. 이 두 글에서 우리는 <논어(論語)>에 대한 두 가지 개념을 얻을 수 있다. 하나는 <논어>의 ‘논(論)’은 ‘논찬(論纂)’하다는 뜻이고, ‘어(語)’는 ‘말’이라는 뜻으로 <논어>는 바로 ‘선생님에게 전해들은 말’을 ‘논찬(論纂)하다’라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논어>라는 이름은 당시에 이미 있었던 것으로, 후에 다른 사람이 갖다 붙인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논어>는 다소 단편적인 문장을 모아놓은 책으로, 이들 문장의 배열에는 반드시 어떤 원칙이 있는 것은 아니다. 즉, 전후 두 장 사이에 반드시 어떠한 연관성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며, 단편적인 문장이 한 사람의 손에 의해 쓰인 것도 아니다. <논어>는 편폭이 짧지만, 오히려 적지 않은 부분에 중복되는 장절이 출현한다. 그 중에 어떤 문장은 완전히 일치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巧言令色鮮矣仁’장이, 먼저 ?학이 편?에 보이며, 또 ?양화 편?에 다시 나온다. ‘博學於文’장은 먼저 ?옹양 편?에 보이고, 또 ?안연 편?에 다시 나온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서 볼 때 <논어>는 공자의 말을 당시 제자들이 각자 기록했다가 후에 모아서 책으로 만들었다고 추론할 수 있다. 따라서 <논어>는 결코 한 사람의 저작으로 볼 수 없다. 그렇다면 <논어>의 저자는 어떤 사람들인가? 가장 유력한 사람은 당연히 공자의 제자들일 것이다. <논어>에는 공자 제자들의 글이 있고, 또 재전제자들의 글도 있다. 또 그 저작연대가 앞선 것도 있고 늦은 것도 있다. 이 점은 단어의 뜻을 운용하는데 있어서도 적당하게 나타난다. <논어>가 설사 많은 사람들의 손에 의해 만들어졌고 이 저자들의 연대 차이가 아마 30∼50년에 지나지 않는다면, 가장 마지막에는 누구의 손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일까? <논어>의 구절을 상세히 살펴보면 <논어>를 편찬한 사람은 아마 증삼의 학생 가운데 한 명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우리는 <논어>가 춘추 말기부터 편찬되기 시작하여 책으로 만들어진 것은 전국 초기라고 생각하며, 이것은 역사적 사실과도 대체로 근접해 있다.
▶이 책의 특징 고전의 현대적 접근을 표방하여 기획된 <<을유사상고전시리즈>> 중 한 권인 <논어>는 형식적인 부분과 내용적인 부분에서 기존에 출판된 <논어>와 약간의 차이가 있다. 형식 면에서는 기존에 번역된 <논어>의 장점을 최대한 살려 보기 편하고 읽기 쉽게 했다. 내용 면에서는 독자들에게 상세한 주석을 제시함으로써 본문의 번역이 왜 그렇게 해석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최소화하고 최대한 그 신빙성을 갖추는 데 주력하였다. 원문의 해당 한자에는 각기 한자의 발음을 달았고, 한글로 토를 달았으며, 기존에 출판된 <논어>와는 전혀 다른 편집 스타일로 한 단락씩 원문을 대조해볼 수 있게 하여 번역이 쉽게 이해되도록 했다. 또한 본문에 들어가기 전에 독자들이 이 책을 이해하는 데 반드시 알아두어야 할 사항에 대해 간략히 언급했으며, 각 편 서두에는 해제를 달아 편장 전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했다.
저자
공자
이름은 구(丘), 자는 중니(仲尼)로, 노나라 사람이다. 중국 춘추 시대 말기의 위대한 사상가이면서 교육가이고, 유가학파의 창시자이다. 노나라 창평향 추읍에서 태어난 공자는 어려서 부친을 잃어 늘 궁핍한 생활을 했고, 장성하여 한때는 위리(委吏)라는 창고지기와 가축을 기르는 승전(乘田)이라는 직책을 맡기도 했다. 30세부터 제자를 받아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안로(顔路), 자로(子路), 백우(伯牛), 자공(子貢), 안연(顔淵) 등의 여러 제자를 길러냈다. 소공 25년에 노나라에서 내란이 일어나자 제나라로 갔으나 거기서도 자신의 뜻을 제대로 펼치지 못하고 다시 노나라로 돌아와 양화(陽貨)가 쫓겨나자 중도(中都)의 재(宰)로 임명되었다가 사공(司空)을 거쳐 마침내 대사구(大司寇)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대사구에 임명되고 얼
마 후 계환자가 정치를 돌보지 않자 공자는 안회와 자로, 자공, 염유 등의 제자를 데리고 노나라를 떠나 약 12년 동안 천하를 떠돌았다. 공자가 노나라에 돌아온 후, 노나라 사람들로부터 “국로(國老)”라고 존경을 받았지만 결국 등용되지는 못했다. 말년에는 교육과 고대 문헌 정리에 힘썼다.
역자
박종연
경북 군위에서 태어나 영남대학교 중문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교 대학원에서 근대한어(近代漢語)를 연구하여 문학석사와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영남대, 동국대, 안동대에서 강의를 했으며, 2000년에는 중국 남경대학(南京大學) 박사과정에 입학하여 중고한어(中古漢語) 분야를 전공하여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인제대학교 중국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옮긴 책으로는 『논어역주』(공역, 1997), 『경서천담』(공역, 2003), 『진고응이 풀이한 노자』(공역, 2004), 『담판』(2005)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