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사가들이 21세기를 수필의 시대라고 말한다. 그래서인지 에세이라는 이름하에 쏟아지는 글들로 홍수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그 예전 피천득 선생의 작품이 그렇듯 문학계가 주목하고 깊은 감동으로 독자의 가슴을 울리는 글은 찾아보기 쉽지 않다.
하지만 진정 21세기는 수필의 세기라고들 말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문을 연 보르헤스도 이제 문학의 문제는 새로운 이야기의 창출이 아니라 기존 문학의 재편성과 재해석일 뿐이라며, 옛 이야기를 ‘다시쓰기’하였다. 픽션의 범람은 픽션이 주는 신비함, 새로움을 스스로 갉아먹고 있는 것이다. 그가 본 것은 픽션의 종언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문학 영역에서의 수필은 다시 조명되어야 하며, 오늘의 한국 수필은 새롭게 전범(典範)을 세워야 한다. 아직까지도 1950년대 쓰여진 수필이 불변의 수필 교과서로 횡행하고 있다는 것은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 수필이 보인 나름대로의 변화와 발전은 간과하고 있는 것이며, 21세기 수필의 발전 역시 저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라 할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시작된 이 책은 현재 <에세이 문학>, <수필과 비평>에서 집필을 맡고 있는 수필 평론가 김종완 씨의 도움으로 우리 세대를 대표하는 작가 6인(법정, 박연구, 박완서, 손광성, 유병석, 전혜린)의 대표작과 작가론을 담고 있다. 이들은 각각 뚜렷하게 구별되는 자신만의 독특한 수필 세계를 구축함으로써, 수필이 시도할 수 있는 다양한 글쓰기의 전형이 될 만하다.
“법정의 수필은 종교적이고 사색적인 수필의 전범을 보여주고, 박연구는 신변잡사의 일상적 사건이 문학적 사건으로 신비롭게 변신하는 실례를 보여 주고 있다. 박완서의 수필은 개인의 역사적 삶 살기를, 손광성은 묘사를 통해서 사물을 이미지화시켜 독특한 미적 세계를 구축하였다. 유병석은 해학과 위트로 사회를 읽었고, 전혜린은 삶의 본질적 의미를 찾는 데 온몸을 불살랐다.”
그러나 이번 작업이 더 큰 의미를 지니는 것은, 대중적으로 크게 성공한 수필가(법정)를 단지 문단과 인연을 맺고 있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수필의 주류에서 배재시킨 문단의 폐쇄성을 극복한 것이다. 또한 소설가로서 이미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박완서를 수필의 영역에서 재조명하고 대표 수필가로 선정한 것과 서사적 수필을 능가하는 서정적 수필(‘수필은 시다’)의 가치를 재평가하고 손광성을 피천득의 뒤를 잇는 작가로 다시 한번 강조한 것은 주목해 볼 만하다.
이 책은 이와 같이 문학사적 의미뿐 아니라, 일반 독자들을 고려한 대중적 의미도 함께 지닌다. 인기 있는 이 시대의 대표적 수필가와 그들의 수작들을 한 권에 접할 수 있다는 점도 그러하지만, 무엇보다 단순한 ‘다시 읽기’에 그치지 않고 ‘깊이 읽기’를 가능케 한다는 데 주목할 수 있다. 편저자는 각 작가의 수필선 뒤에‘수필 같은 비평’을 실어 작가와 대표작의 감상을 가이드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이는 기존의 감성적 수필 읽기의 한계를 극복하고 작가와 작품의 색과 깊은 맛을 제대로 음미하며 감상하는 데 도움을 준다. 특히 수필을 공부하거나 새로운 글쓰기를 모색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길잡이가 될 수 있다.
법정
버리고 떠나기
겨울 숲
낙엽은 뿌리로 돌아간다
무소유
불일암의 편지
빈 뜰
초가을 산정에서
화전민의 오두막에서
생각을 씨앗으로 묻으라
여기 바로 이 자리
작가론 : 사람 숲에 서 있는 청정한 나무
박연구
바보네 가게
외가 만들기
말을 알아듣는 나무
초상화
변소고
육안과 심안
평범한 사람들의 철학
작가론 : 자기애의 신화
전혜린
회색의 포도와 레몬빛 가스등
홀로 걸어온 길
독일로 가는 길
목마른 계절
가을이면 앓는 병
긴 방황
남자와 남편은 다르다
작가론 : 삶이 신화가 된 작가
유병석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딸아 딸아
자반을 먹으며
남성칠악에의 변백
'?㎢?' 이야기
왕빠깝빠
조랑말은 달리고 싶다
작가론 : 정과 해학과 현실
손광성
아름다운 소리들
문간방 사람
발자국 소리
달팽이
장작 패기
돌절구
바다
작가론 : 묘사로 구축한 미의 세계
박완서
살아 있는 날의 소망
땅을 밟기 위하여
소멸과 생성의 수수께끼
가을의 예감
아름다운 것은 무엇을 남길까
노년
마음 붙일 곳
작가론 : 정직한 현실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