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자 시인이 번역한 ‘죽음과 예술에 관한 고찰’
한국에서도 40년 넘게 사랑받았던 스테디셀러
기존 번역 누락분을 추가한 국내 최초의 완역판
자살을 다룬 책 중에 국내에서 가장 꾸준한 관심을 얻은 책은 무엇일까. 이 분야의 고전인 에밀 뒤르켐의 『자살론』 다음으로 들 수 있는 책이 바로 앨 앨버레즈의 『자살의 연구』다. 이 책은 1982년에 최승자 시인이 번역한 판본이 상당한 인기를 끌면서 스테디셀러가 되었고, 이후 40년 가까이 판매를 이어 오며 한국 독자들에게 시대를 넘어선 명저로 자리 잡았다. 암실문고에서 새롭게 내놓은 『자살의 연구』는 이 최승자 번역본을 바탕으로 전면 개정했으며, 여기에 기존 판본이 누락했던 내용을 추가 번역한 국내 최초의 정식 완역판이다. 추가한 분량은 원서 기준으로 약 50쪽에 이른다.
이 책은 어떻게 40년 넘게 사랑받을 수 있었을까
자살을 다룬 책 가운데 꾸준히 읽히는 책을 만나기 어려운 건 무엇보다 사회과학 이론이 빠르게 변화하기 때문이다. 시대에 뒤처진 이론을 다루는 책은 수명을 다했다고 여겨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유행으로 따지면 가장 낡은 유행이라 할 수 있는 프로이트 심리학을 중점적으로 언급하는 이 책이 수십 년 동안 사랑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앨버레즈가 사회학과 심리학을 언급하면서 특정 이론을 겸손하게 소개하는 (즉 암묵적으로 지지하는) 단계를 넘어섰기 때문일 것이다. 앨버레즈가 프로이트를 중점적으로 언급하는 건 그가 가장 옳아 보이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프로이트가 이론적인 좌절을 많이 겪은 심리학자였기 때문이다. 번화한 빈에서 축성된 프로이트의 현실관은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점점 무너졌고, 그는 그렇게 붕괴한 세계에 걸맞은 이론을 다시 설계해야 했다. 앨버레즈는 이러한 태도에 주목했다. 프로이트 이후의 심리학자들이 대개 자신의 이론을 신뢰하고 그것을 공고히 하려 했던 반면, 프로이트는 자신이 이룬 이론적 성취를 확신하지 않음(혹은 실패함)으로써 인간의 마음을 사회-이론 안에 집어넣는 행위가 궁극적으로는 불가능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자살과 창작이라는 공동 운명체
이처럼 앨버레즈는 자살을 사회적 압력에 종속된 개념으로 보지 않는다. 피해자로서의 자살자라는 개념은 그가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다. 문학 비평가이자 작가였던 앨버레즈가 몸담고 있던 예술계에서는 에너지가 넘치는 인물일수록 자살을 기도할 확률이 높았고, 그 사실은 자살이 때에 따라서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선택이기도 하다는 점을 암시했던 것이다. 즉 앨버레즈가 보기에 자살은 인간의 내적 에너지가 일으키는 여러 불꽃 가운데 하나였다. 실제 동료이자 친구였던 실비아 플라스의 자살을 되짚던 그는 마지막 자살 시도를 하던 당시의 플라스가 실제로는 죽으려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과감한 주장을 펼친다. 그때 플라스는 가상의 죽음을 겪어 냄으로써 스스로를 새로운 단계로 끌어올리려 했다는 것이다.
앨버레즈에 따르면, 몇 가지의 불운이 아니었다면 플라스는 죽지 않았을 터였다. 실제로 죽으려 했을 때는 신기한 확률로 죽음을 피했고, 실제로 죽지 않으려 했을 때는 마찬가지의 낮은 확률로 죽음에 당도해 버린 아이러니. 플라스의 삶은 이처럼 아이러니한 운명(혹은 이 책의 원제인 ‘흉포한 신Savage God’)을 상대로 한 인간의 삶과 예술이 하나의 공동 운명체처럼 뒤얽혀 대항하는 모습을 그려 낸다. 이때 죽음을 선택한다는 것은 창작이나 마찬가지로 자신의 내면을 표출하는 행위가 되며, 따라서 자살은 세계에 대항하는 수단 가운데 하나로 격상된다. 『자살의 연구』는 이러한 논지를 펼쳐 가면서 마치 알베르 카뮈의 『시지프 신화』와 장 아메리의 『자유죽음』을 합친 듯한 뜨거움을 선보인다. 중요한 것은 세계에 맞선 인간의 태도, 그리고 그 태도를 행동으로 옮기는 에너지다. 그가 어떤 패를 꺼낼 것인지는 이후의 문제다.
자신의 생명을 걸어 세계와 맞선다는 것
이렇듯 앨버레즈는 사회학과 심리학, 창작론을 독창적으로 뒤섞어 자신만의 관점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이어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상에 맞선 예술가들을 소개한다. 그들 중 많은 수가 자살과 연결되어 있지만, 앨버레즈는 그 모든 자살이 현실에 패배한 결과가 아님을 상기시킨다. 살아 있을 것인가, 아니면 죽음과 같은 삶을 거부하고자 죽을 것인가? 특히 스스로 절멸을 향해 가는 현대 문명과 마주한 인간-각자의-삶은 그 문명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결국, 자살이라는 사회 문제를 해결하자는 식의 공익적이고 착한 내용은 이 책에서 만날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삶을 가지고 세계와 어느 정도까지 맞붙을 수 있는가를 고찰하는 이 책은 고독한 독자들의 잔불처럼 잦아든 마음을 다시금 달구어 줄 뿐이다. 그리고 이 불길은 그 어느 때보다 차가운 21세기를 살아가는 독자들에게 무척 반갑고 소중한 열기를 전해 줄 것이다.
저자
앨 앨버레즈
본명은 앨프리드 앨버레즈. 앨 앨버레즈 혹은 A. 앨버레즈라는 필명으로 활동한 작가 겸 비평가이다. 옥스퍼드대학에서 영문학 전공으로 수석 졸업한 뒤 대학에서 교편을 잡았으나, 20대 후반에 접어들며 전업 작가가 되었다. 『옵서버』의 시 평론가로 10년 동안 활동하며 영국에 외국 시인들을 다수 소개했으며, 직접 쓴 시집과 산문들도 좋은 반응을 얻었다. 특히 대표작으로 꼽히는 『자살의 연구』는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도 독자들에게 사랑받는 책으로 남아 있다.
역자
최승자
시인이며 번역가로서 시집으로 『쓸쓸해서 머나먼』, 『이 시대의 사랑』, 『즐거운 일기』 등이 있고, 역서로는 『침묵의 세계』, 『빈센트, 빈센트, 빈센트 반 고흐』,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등이 있다.
역자
황은주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철학과 불문학을 공부했다. 현재는 영어와 프랑스어 책을 우리말로 옮기고 있다. 옮긴 책으로 『루소의 식물학 강의』, 『다가올 사랑의 말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