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퀴어 세계
플라톤과 미켈란젤로, 셰익스피어와 오스카 와일드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위대한 작품들을 낳은 대가라는 점 외에도 동성 간의 사랑을 이상적 형태로 여기고 이를 추구했다고 알려진 인물들이다. ‘퀴어’는 이렇듯 어느 날 갑자기 툭 하고 튀어나온 존재가 아닌, 고대 혹은 그 이전부터 인류 역사에서 자연스럽게 존재해 왔다. 잘 알려졌다시피 고대 그리스에서 ‘소년애’는 장려되는 관습이었고, 여성이 아닌 소년을 마음에 품고 그들을 육체적, 지적으로 함양하는 데 힘쓰는 것이 훌륭한 남성이 갖춰야 할 미덕으로 간주되었다.
19세기 인물이었던 오스카 와일드는 엄중한 외설 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재판대에 섰으나, 그보다 훨씬 오래전 사람인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은 동성애가 너무도 자연스러운 환경 속에서 ‘소수자’의 설움을 경험할 일 따위는 없었다. 그렇다면 오늘날은 어떠한가. 이 두 가지 모습이 혼재한 가운데 한 문화권에서는 다른 문화권에서보다 ‘퀴어함’이 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반면, 특정 종교는 그것을 사탄의 행위와 동일시하기도 한다.
우리나라 역시 여러 문화 콘텐츠에서 퀴어 소재를 다루는 게 이제는 꽤 흔한 일이 될 만큼 다양성을 인정하는 사회로 진일보해 가고 있으나, 한편에서는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운집해 동성애 반대 집회를 여는 등 여전히 편협한 시각이 존재한다. 『키스를 멈추지 않을 거야』는 퀴어 정체성을 지닌 저자와 화가가 사랑에 있어서 오늘날보다 훨씬 열린 사회였던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선례를 탐색해 나간 책이다.
사랑의 기쁨과 고통, 때로는 기묘한 욕망을 노래하다
이 책의 제목으로 차용한 “키스를 멈추지 않을 거예요”라는 문장은 기원전 6세기의 그리스 시인인 테오그니스의 서정시에 나오는 구절이다. 저자에 따르면 테오그니스의 서정시는 두 권으로 나뉘어 있는데 제2권에 실린 시 164편은 대개 동성애가 주제이며 아름다운 소년에게 바치는 시이거나 사랑의 고통과 기쁨을 노래한다.
남성 간의 동성애가 주를 이루는 가운데 퀴어 여성의 사랑은 그리스와 라틴 고전 문학에 남은 기록이 훨씬 적다. 레즈비언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그리스 여성 시인 사포의 시가 일부 소개되고, 여성 간의 욕망을 그린 로마의 시인 마르티알리스의 풍자시는 ‘외설스럽다’는 이유로 현대판에서 삭제된 이력이 있지만, 퀴어 여성의 사랑에 관한 기록이 워낙 적은 탓에 저자는 그 글들을 “그 모든 지저분한 영광” 그대로 이 책에 실었다고 밝히고 있다.
‘퀴어(queer)’라는 영어 단어의 또 다른 뜻처럼, 우리는 다양한 신화 속 기묘하고 괴이한 장면을 마주치기도 한다. 자신의 욕망을 용납하지 않는 세상에서 관습을 따르기 위해 완전히 다른 존재로 변신한 이야기 속 주인공이 있는가 하면, 무덤에서 자라난 무화과나무를 연인의 환생으로 생각해 나뭇가지로 사랑의 행위를 하는 축제의 신 디오니소스 이야기도 있다. 저자는 이들을 단지 ‘이상한’ 존재로 치부하기보다, 솔직하고 간절한 사랑과 욕망의 수만 가지 얼굴 중 하나로 우리에게 그려 보인다.
삭제되지 않은 진짜 세상을 담아낸 퀴어 작가들의 감동적인 글
세상에는 단 두 종류의 성별만 있고, 이 서로 다른 성별을 가진 사람들의 사랑만을 소위 ‘정상’으로 간주하는 세상은 진짜 세상을 담아내지 못한다. 이미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역사와 문화는 퀴어 사랑의 증거로 넘쳐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가 지적한 대로 “퀴어의 역사가 계속해서 무더기로 삭제”되고, “그 기록이 당혹스러울 만큼 침묵에 싸여” 있는 가짜 세상에서 “구석구석 퀴어함이 흐르는” 먼 옛날로의 여행은 누군가에게는 ‘소속감’이라는 든든한 울타리를 부여받는 뭉클한 경험이 되기도 한다.
저자
숀 휴잇
아일랜드의 시인이자 작가, 문학평론가. 더블린 트리니티대학에서 영국 및 아일랜드의 현대 문학을 가르치며 『아이리시 타임스』의 서평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첫 번째 시집 『불의 혀 Tongues of Fire』(2020)로 로럴상을 수상했으며, 『선데이 타임스』 올해의 젊은 작가상, 존 폴러드 국제 시상 John Pollard Foundation International Poetry Prize, 달키 문학상 후보에 올랐다. 자서전 『광막한 어둠 속에서 All Down Darkness Wide』 역시 2022년 『커커스 리뷰』 최고의 책, 『퍼블리셔스 위클리』 최고의 논픽션에 선정되며 주목받는 작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현재 더블린에 거주하며 자연 세계와 과거의 존재, 그리고 언어의 소리에서 영감을 받아 작업하고 있다.
저자
루크 에드워드 홀
영국의 화가이자 디자이너, 칼럼니스트. 센트럴 세인트 마틴스에서 패션과 섬유를 공부했다. 역사에서 영감을 얻고 도발적인 낭만주의의 시각을 통해 재해석되는 작품을 선보이는 작가다. 버버리, 딥티크,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뮤지엄 등과 공동 작업했으며, 파리 레되가르 호텔의 인테리어 디자인을 담당하고, 2022년에는 샤토 올란도라는 패션 브랜드를 론칭하기도 했다. 『파이낸셜 타임스』에 매주 디자인과 라이프 스타일에 관한 글을 기고하고 있으며, 현재 런던과 글로스터셔를 오가며 활동하고 있다. 아테네 브리더 갤러리에서 그의 드로잉과 회화를 감상할 수 있다.
역자
김하현
서강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일한 뒤 현재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 『식사에 대한 생각』, 『디컨슈머』, 『한 번 더 피아노 앞으로』, 『지구를 구할 여자들』, 『결혼 시장』, 『팩트의 감각』, 『미루기의 천재들』, 『분노와 애정』, 『여성 셰프 분투기』, 『뜨는 동네의 딜레마, 젠트리피케이션』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