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주변에 산재한 괴물들,
갈수록 깊어지는 팬의 딜레마
로만 폴란스키, 마이클 잭슨, 파블로 피카소, 마일스 데이비스, 헤밍웨이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자기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예술가들이라는 점이다. 이들 앞에는 ‘최고의’, ‘천재’, ‘세계적인’ 같은 수식어가 자연스럽게 따라붙는다. 이들의 두 번째 공통점은? 추악한 스캔들의 주인공이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위대한 작품을 탄생시킨 예술가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성폭행범, 학대범, 마약 중독자, 포주이기도 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여러 얼굴을 가질 수 있지만, 숭배와 혐오라는 양극단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사람들을 향해 우리는 ‘괴물 같다’는 표현을 쓰곤 한다.
괴물은 도처에 있다. 영화 〈타르〉는 우리 주변에 있을 법한 괴물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지닌 세계 최고의 지휘자 리디아 타르는 실력에 있어서도 괴물이지만, 자신의 지위를 사적인 욕망을 충족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한다는 점에서 또 다른 괴물이다. 그녀가 인생의 정점에서 몰락하는 과정을 담담한 시선으로 따라가는 이 작품은 관객으로 하여금 예술과 예술가의 삶의 분리 문제를 생각해 보게 한다. 최근 『뉴욕 타임스 매거진』에는 가수 프린스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둘러싼 논쟁을 다룬 글이 한 편 실렸다. 미국 팝 역사에 한 획을 그은 프린스라는 인물을 가감 없이 보여 주고자 한 제작진과, 프린스가 자신을 폭행했다고 주장하는 여자친구의 증언은 거짓이라며 방영을 필사적으로 막고 있는 프린스 재단 사이의 갈등 역시 우리 사회에 ‘괴물’이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는지, 또 한편으로 도덕적 결함이 드러난 괴물 예술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고민을 안겨 주는 단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소셜 미디어의 발달로 개인 간 사생활의 경계가 모호해져 가는 요즘, 우리는 평소 흠모해 왔던 스타를 과거보다 훨씬 가까운 거리에서 지켜보게 된다. 그럴수록 딜레마는 깊어진다. 스타를 팔로잉하고 일상을 들여다보며 내적 친밀감과 신뢰를 두둑이 쌓아 놨는데, 어느 날 그가 범죄자가 되어 나타난다면 과연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팔로잉을 취소해 버리면 끝나는 문제일까? 취소한 이후에도 그가, 그의 작품이, 그의 흔적이 머릿속에 계속 맴돈다면?
『괴물들』은 괴물과 그들의 창작물을 소비하는 관객의 딜레마적 상황에 정면으로 부딪쳐 보는 책이다. ‘작품과 창작자는 분리해야 하는가’는 해묵은 논쟁거리이지만 그동안 양쪽의 의견을 각각 들어보고 비교해 보는 시도는 많았던 반면, 한 작가가 직접 딜레마의 당사자가 되어 해당 주제를 집요하게 파고들어 간 결과물은 없었다는 점에서 반가운 성과라 할 만하다.
유수 매체들에서 선정한 ‘올해의 책’
로만 폴란스키부터 조니 미첼까지―괴물이 된 천재들
저자 클레어 데더러는 예술 애호가로서 영화, 음악, 미술, 책 등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며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하는 딜레마를 솔직하고도 지적인 방식으로 적어 내려간다. 『뉴욕 타임스』의 리뷰처럼 “논문이기도 하고, 회고록이기도 하며, 그 외의 모든 것이기도 한” 이 책은 “지적인 만족감을 선사하는 올해 최고의 논픽션 도서”(『타임스』), “이 시대의 가장 시급한 문화적 질문에 대한 귀중한 고찰”(『라이브러리 저널』) 등의 찬사를 받으며 미국의 유수 매체들에서 선정하는 ‘올해의 책’에 이름을 올렸다.
시작은 로만 폴란스키였다. 〈혐오〉, 〈악마의 시〉, 〈차이나타운〉 등을 연출한 천재 영화감독으로 저자 데더러를 비롯해 전 세계의 시네필이 그의 영화 미학을 찬양한다. 하지만 사생활로 보자면 그는 열세 살 소녀에게 약물을 먹여 성폭행을 저지른 아동 흉악범이다. 이 괴리가 팬들의 마음에도 균열을 냈다. 그의 영화를 너무나도 사랑하지만 이런 사실을 안 이상 영화를 마음껏 소비할 수가 없다. 양심이 우리를 방해한다. 사적인 슬픔과 딜레마에 국한되는 줄 알았던 현실의 괴리는 ‘미투 운동’을 만나 집단적 분노의 영역이 되었다. 저자의 여정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괴물은 성별을 가리지 않는다. 남성 괴물이 대체로 흉악한 범죄의 모습으로 나타난다면, 여성 괴물은 대체로 ‘모성’과 관련되어 나타난다. 아이를 유기한다든지 방치하는 등 사회에서 정상성으로 치부하는 모성애가 충분치 않다고 여겨지면, 여자는 괴물이 된다. 페미니스트 작가로서 저자는 여기에도 의문을 제기한다. ‘모성’이라는 기준은 어째서 여성 예술가에게만 적용되는지, 아이들을 두고 떠나 작가로서 성공한 도리스 레싱과 태어난 아기를 입양 보낸 조니 미첼을 너무 쉽게 ‘괴물’로 만들어 버리는 순간, 예술 하는 여성이 설 자리는 어디인지 성찰하는 대목은 우리 사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촘촘한 사유의 그물을 엮어 낸 저자의 노력이 빛나는 책
에세이로서 이 책이 가장 빛나는 지점은 저자가 자신의 ‘괴물성’을 들여다보는 부분이다. 데더러는 괴물성을 타자화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작가이자 엄마로서 자기 안의 ‘괴물’을 바라보고자 한다. 저자 역시 ‘모성’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만약 자신이 더 이기적이라면(남자처럼 야망을 추구하고, 복도에 놓인 유모차를 무시하고, 아이들을 등진 채 방문을 닫는 등) 내 작품이 더 나아질까 질문한다. 더 큰 이기심을 열망하지 않았기에 작가로서 실패한 건 아닐까 자문한다. 이 책이 많은 이들의 공감과 지지를 얻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처럼 자기감정에 충실하고 자기 안의 이중성과 모순을 기꺼이 인정하려는 저자의 태도가 있다.
‘감정’은 이 책을 관통하는 중요한 키워드이기도 하다. “괴물 예술가의 작품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는 언뜻 철학적 질문처럼 보이지만 저자에게 이것은 감정적 질문이고, 그 감정이란 결국 사랑이다. 예술을 ‘소비’한다 말하지만, 사실 그 앞에는 ‘감정적’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게 더 정확하다. 예술은 소비 사회의 상품을 넘어 우리의 감정과 직접적으로 교류하는 그 무엇이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저자의 질문은 다음과 같이 확장된다. “우리가 ‘사랑하는’ 괴물 같은 사람들에 대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여러 방면의 예술을 두루 향유하고 애호해 온 저자의 이력과, 시시때때로 떠오르는 생각과 질문들을 기민하게 낚아채 촘촘한 사유의 그물을 엮어 낸 저자의 노력이 빛나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