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적 유전자』를 잇는
진화론의 또 다른 대표 도서
이 책은 진화론을 연구하는 데 있어 커다란 흐름 가운데 하나인 유전자-문화 공진화론을 대표하는 고전이자 『이기적 유전자』와 더불어 과학계에 영향을 미친 주요 저서 가운데 하나다. 2009년에 ‘유전자만이 아니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이후 역자 주석을 새롭게 추가하고 그간 시대 변화에 맞춰 서문을 보강한 개정판으로 오늘날에도 여전히 논쟁적이면서 매력적인 화두를 제시하고 있다. 최재천 교수가 “인간 행동과 사회 진화가 큰 그림으로 그려질 것”이라고 추천할 만큼 인류의 문명과 사회에 관한 새로운 관점을 보여 준다.
철학자 로크는 일찍이 우리의 본성이 ‘빈 서판’과 마찬가지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하지만 이후 상당 부분 유전자의 영향을 받은 채로 태어난다는 ‘이기적 유전자’라는 개념이 등장했다. 유전자가 정말 ‘이기적’인지 여부는 제쳐두더라도 우리의 신체 구조는 물론 행동과 정신 형성에 유전자가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점은 엄연한 과학적 사실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이후 문화 역시 유전자의 영향을 받아 나타난 ‘확장된 표현형’인지 아니면 문화가 유전자 발현에 되먹임 작용으로 영향을 미치는지를 놓고 논쟁은 확대되었다.
『유전자는 혼자 진화하지 않는다』는 이러한 문화와 유전자의 관계, 나아가 진화에 있어 문화의 역할과 영향을 명쾌한 논리로 풀어 나간다. 오늘날 진화론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명저로 자리매김한 이 책에서 저자는 흥미로운 예시와 사고실험으로 설득력 있게 논의를 전개해 간다. 이러한 예 가운데 하나가 북극에서 카약을 만들어 보는 사고실험이다. 저자는 우리가 느닷없이 북극의 해변에 떨어져 떠다니는 나무와 바다표범 가죽으로 카약을 만들어야 하는 상황을 상상해 보라고 제시한다. 카약이 어떻게 생겼는지, 어느 정도 큰지, 건조 과정 등을 대략 알고 있다고 해도 우리는 만족할 만한 성공을 얻지 못한다. 카약이 얼핏 보기에는 단순해 보여도 사실 각 부분의 치수를 맞춰서 제작해야 하는 기술 집약적인 물건이기 때문이다. 만약 카약을 만드는 설계도가 유전자에 새겨져 있었다면 우리는 쉽게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이처럼 문화는 유전자에 기록되기에는 복잡하며 자연선택으로 결정되기에도 너무나 빠르게 변한다. 인터넷에 접속하거나 휴대전화로 SNS를 검색해 보면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밈이 탄생하고 사라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렇다고 문화가 유전자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고 할 수는 없다. 문화를 이루기 위해서 기본적인 학습과 모방에 관한 메커니즘이 유전자에 새겨져 있어야만 한다. 유전자와 문화는 과학과 인문학의 영역처럼 별개의 개념처럼 보이지만 사실 하나의 개념으로 묶어 이해해야 하는 통섭의 시각이 필요하다. 이 책은 이러한 사실들을 통해 우리에게 지금까지와는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볼 필요성을 역설한다.
문화는 인류의 진화를 어떻게 변화시켰는가
유전자와 문화를 별개가 아닌 DNA의 이중나선처럼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한다면 서로 영향을 주고받을 수밖에 없다는 잠정적인 결론을 도출해 낼 수밖에 없다. 언뜻 보기에 서로 연관되지 않는 듯이 보이는 유전자와 문화가 공진화한다는 대표적인 예로 성인의 락토오스 소화 진화를 들 수 있다. 1970년대 초반, 지리학자 프레드릭 시문스는 락토오스를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이 낙농업의 역사에 대한 반응으로 진화했다고 설명했다. 유럽 북서부 사람들은 오랫동안 젖소를 기르고 신선한 우유를 소비한 반면, 다른 지역에서는 낙농업을 하지 않거나 아주 특수하게 일부에서만 이뤄질 만큼 일반적이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젖소를 사육하는 문화가 발달하지 않았던 아메리카 원주민이나 태평양 연안의 섬 주민, 극동 지방에서 거주하는 사람, 아프리카인 중에서는 락토오스를 흡수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러한 시문스의 가설은 당시에는 논란거리였지만, 이후 유전적 자료에 의해 단 하나의 우성 유전자가 락토오스 소화 여부를 결정한다는 것이 밝혀졌고, 면밀한 통계적 분석으로 낙농업 문화가 역사적으로 존재했는가 여부가 이 유전자의 높은 빈도를 예측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변수라는 것이 밝혀졌다.
유전자의 영향으로 각 개인의 심리와 행동에 표현형이 드러나고, 다시 문화적 차이에 의해 선택압이 작용한다. 이는 오랜 시간을 들여 자연선택이 이루어져 진화에 영향을 끼치는 것과 비슷하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 대한 정보를 유전자에 담아서 전달하듯이, 문화 역시 어떤 방식으로든지 세계에 대한 유용한 정보를 동시대 사람들과 후손들에게 전달한다. 이렇게 전달되는 문화적 변형인 신념, 가치, 기술이 원형에 가깝게 유지된다면, 집단유전학에서 세대별로 유전자 빈도를 추적하듯이 문화적 변형의 빈도를 추적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이해하기 어렵거나 얼핏 이상해 보이는 진화적인 흐름도 명쾌하게 살펴볼 수 있다.
단순히 유전자의 관점으로만 보자면 부적응이라 할 수 있는 것 가운데 하나가 적은 수의 자녀만을 갖는 사회적 현상이다. 우리는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 가운데 자녀의 수가 적은 경우를 종종 본다. 하지만 이는 유전자 관점에서는 이해하기 힘들다. 기존의 진화론에서 보자면 자기 유전자를 널리 퍼트리려는 본능이 강하기 때문에 경쟁에서 우위에 설수록 더 많은 자녀를 가져야 옳다. 하지만 문화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자녀를 적게 갖는 만큼 교육에 좀 더 투자하고, 자신의 개발에도 신경을 더 쓰는 문화가 주류적인 위치를 차지한다면 충분히 설명이 가능하다. 이러한 이기적인 문화적 변형을 통해 유전자의 관점에서 볼 때 부적응적인 관념이 확산된 것이다. 오늘날 출산율이 떨어지는 현상도 문화적 진화의 흐름과 같이 연계해서 살펴야만 문제의 핵심을 제대로 짚을 수 있다.
이 밖에도 책에서는 기존의 사고 틀에서 벗어나 폭넓게 세상을 재시각화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계속 펼쳐진다. 이를 통해 독자는 인간의 행동과 심리에 대해 좀 더 깊이 있는 통찰을 얻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