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아홉부터 쉰여섯까지 보부아르 인생에서
가장 열정적이고 솔직한 사랑의 속내가 담긴 서한집
사랑의 모양은 다양하다. 한 사람의 사랑에도 스무 살의 것과 마흔 살의 것이 다르다. 언제 어떻게 누구와 만들어 가느냐에 따라 그 모양이 달라진다. 지구상에 똑같은 사랑이란 없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페미니스트 시몬 드 보부아르는 실제로 어떤 사랑을 했을까? 그녀의 사랑에는 장 폴 사르트르와의 ‘계약 결혼’ 형태 외에 다른 모양은 없었을까?
현대 여성학의 성서라 불리는 『제2의 성』이 출간되기 2년 전인 1947년에 보부아르는 장 폴 사르트르와 함께 미국 강연을 갔다가 그곳에서 미국 소설가 넬슨 올그런을 만난다. 둘은 첫 만남에서 바로 호감을 느꼈고, 이후 1964년까지 17년간 대서양을 넘나드는 사랑의 편지를 주고받는다. 그리고 이 편지들이 세상에 공개되리라 예감한 그녀는 죽기 전에 이 책의 출판 작업을 직접 감독하고자 한다. 하지만 그녀에겐 시간이 많지 않았고, 결국 그녀 사후 11년 만인 1997년에 양녀 실비 르 봉 드 보부아르에 의해 그 모습이 알려진다.
『연애편지』에는 보부아르가 넬슨 올그런에게 17년간 보낸 304통의 사랑이 담겨 있다. 보부아르는 넬슨을 ‘악어’로, 자신을 ‘개구리’로 비유하면서 사랑하는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내고, 사르트르에게는 쓰지 않았던 ‘사랑하는 나의 남편’이라는 표현을 수시로 사용한다. 보부아르를 급진적 페미니스트이자 결혼 제도를 거부한 사람으로만 생각한 독자라면 그녀의 이런 낯선 모습에 당혹스러워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랑에 빠진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녀의 솔직하고 정열적인 모습에 공감하며 되레 친근함을 느낄 것이다. 특히, 중년에 새로운 사랑을 만난 그녀의 모습은 스무 살 때와는 다른 묘한 생명감과 매력을 더한다. 이제 더 이상 가슴 두근거릴 일이 없다고 생각한 그녀는 마흔을 앞둔 나이에 일생에서 가장 달뜨고 아프고 벅찬 사랑을 경험한다. 덕분에 우리는 운 좋게도 사랑에 빠진 보부아르가 가슴 깊은 곳에서 써 내려간 아름다운 문장들을 함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만남에는 반드시 헤어짐이 있게 마련이다. 둘은 사랑이 깊어질수록 양립될 수 없는 것들, 즉 두 사람이 각각 살아가는 터전인 파리와 시카고라는 두 공간의 현실 앞에서 갈등하게 된다. 따라서 『연애편지』에는 보부아르와 넬슨이 서로 사랑하는 모습뿐만 아니라 갈등하다가 헤어지고, 다시 만나지만 결국 우정으로 바뀌었다가 연이 끊어지는 등 17년간 변모하는 관계 양상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에 따라 보부아르의 심적 상황도 달라지기 때문에 이 책은 마치 한 편의 소설을 읽는 것처럼 흥미롭다. 그들의 사랑이 어떻게 전개되고 왜 맺어질 수 없었는지, 결별 후에는 관계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등을 들여다보면서 우리 각자의 애정과 우정 관계뿐만 아니라 인간관계의 전반적 의미를 되돌아볼 수도 있겠다.
카뮈, 콜레트, 지드, 자코메티, 피아프, 장 콕토, 채플린 등
20세기를 풍미한 예술가들에 대한 아주 사적인 기록문학
보부아르의 편지들에는 연애 이야기만 담긴 것이 아니다. 보부아르와 올그런은 프랑스와 미국이라는 서로 다른 문화 속에서 자랐다. 프랑스어를 할 줄 모르는 올그런을 위해 보부아르는 영어로 편지를 썼고, 올그런에겐 낯선 유럽의 문화와 예술, 사회 등을 친절하고 자세하게 설명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이 그렇듯, 보부아르는 올그런을 자기 세계로 초대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몸담고 있는 세계를 모르는 연인에게 자기 내면에서 순간순간 일어나는 사랑의 환희·고통·그리움의 감정뿐 아니라, 매일매일 자신과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글로 옮겨 전했다. 덕분에 이 편지들에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유럽인들의 생활양식과 사회상, 급변하는 세계정세 속에서 정치에 대한 시각, 1940~1960년대 문화예술인들이 일상에서 자기 삶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펼쳐 나갔는지 등이 구체적으로 가감 없이 묘사되어 있다.
일례로 실패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알베르 카뮈와 관련된 에피소드들, 그녀가 프랑스에서 유일하게 위대한 여성 작가라고 생각한 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와의 만남, 한때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노년 작가 앙드레 지드의 죽음, 절친한 친구이자 존경하는 현대 조각가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성실한 예술관과 아틀리에 이야기, 사르트르가 연극 〈더러운 손〉을 무대에 올리기까지 겪어야 했던 고난들과 그를 도와준 장 콕토, 애정하는 배우 찰리 채플린과의 만찬 자리, 부자연스러운 몸짓과 쉰 소리가 매력적인 에디트 피아프, 동성애자 시인 장 주네의 삶, 사르트르의 가까운 사촌인 앨버트 슈바이처, 그리고 툴루즈 로트레크의 전시회 등 당대를 주름잡은 예술가들과 얽힌 아주 사적인 일화들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또한 중국, 멕시코, 쿠바, 유고슬라비아, 스웨덴, 노르웨이, 아이슬란드, 스위스 등 여행을 좋아하는 보부아르가 다양한 나라를 방문하면서 남긴 기록들 등 올그런에 대한 사랑 이야기뿐만 아니라 20세기 유럽 풍속도를 보는 것처럼 흥미로운 읽을거리가 풍성하다.
『제2의 성』부터 『아주 편안한 죽음』까지
보부아르의 주요 대표작들이 탄생하는 결정적 순간들
보부아르에게 세계적 명성과 부를 안겨 준 철학서 『제2의 성』(1949), 공쿠르상 수상과 함께 작가로 자리매김하도록 해 준 소설 『레 망다랭』(1954), 그리고 문학적 글쓰기의 정점에서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 자전적 소설 『아주 편안한 죽음』(1964) 등 보부아르의 주요 작품이 출간된 시기와 올그런과의 서신 교환 시기가 맞물려, 『연애편지』에는 저자 육성으로 걸작 탄생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직접 듣는 재미가 있다. 일례로 『제2의 성』은 출간 후 몇 개월간 베스트셀러 자리를 굳건히 지켰지만, 프랑스 북부의 한 연맹에서 부도덕하다고 배척한 때문에 경찰들이 더 이상 서점에서 『제2의 성』을 진열할 수 없게 했다. 『레 망다랭』은 프랑스의 권위 있는 문학상인 공쿠르상을 수상한 작품인데, 그녀는 이 상을 받은 후에 너무 많은 관심을 받아 병이 난 이야기를 들려준다. 또 이 상에 대한 몇 가지 뒷이야기들도 덧붙인다. 그리고 『아주 편안한 죽음』이 탄생하기까지의 과정, 즉 엄마가 병원에 입원한 당시 상황과 돌아가시는 순간, 엄마의 죽음 이후 휘몰아치는 감정들에 대해서도 밝힌다.
한편, 이 책은 1997년 프랑스에서 출간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보부아르 연구가 이정순의 번역으로 국내에서 1999년과 2000년에 두 권짜리로 출간된 바 있다. 그로부터 25년이 지난 2024년, 역자는 첫 출간 당시 의도치 않게 있었던 번역상의 오류와 현시점에서 더 이상 유효치 않은 표현이나 문장 등을 다시 손보는 과정에서 이 책의 문학적·사료적 가치가 여전하다는 것을 확인했다고 한다. 사실 서한집은 글쓴이와 관련 당사자들의 내밀한 사적인 기록이므로 그 내용과 시효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정순 역자는, 보부아르의 『연애편지』는 “개인적 삶의 기록이라는 서한집의 한계를 뛰어넘을 뿐 아니라 시공간을 초월하여 보편적 관심과 흥미를 일으키는 기록문학으로서의 가치를 지닌다”고 단언한다. 그러면서 “이번 재번역 작업은 위대한 작가의 역량이란 작품뿐만 아니라 서한집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남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고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