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의 평가를 오가는 쳇 베이커의 삶과 예술
17년 만에 새롭게 펴내는 개정판
천사이거나 악마, 혹은 사람들이 아주 좋아하거나 아주 싫어하는 인물. 한 사람에 대한 평가가 이렇게 극단을 오가는 예는 흔치 않을 것이다. 천사의 목소리를 지녔으나 실제의 삶은 악마에 가까웠고, 유럽 대륙에서는 그야말로 추앙받는 존재였으나 정작 자신의 고향인 미국에서는 환대받지 못했던 재즈 뮤지션, 쳇 베이커 이야기다.
이 책은 레나 혼, 페기 리, 조지 마이클 등의 전기를 집필하며 ‘킬러 전기작가’의 명성을 얻은 제임스 개빈의 역작으로, 암스테르담에서 약물과 연루된 의문의 죽음 이후 신비로운 이미지로 팬들의 뇌리에 자리 잡은 트럼페터의 삶을 날카롭게 분석한 전기다. 한번 듣는 것만으로 모든 곡의 핵심을 꿰뚫는 천부적인 재능과 “재즈계의 제임스 딘”으로 불릴 정도로 잘생긴 외모는 그에게 탄탄대로의 삶을 약속한 듯 보였으나, 그 시대의 많은 뮤지션들이 그러했듯 쳇 베이커 역시 평생 마약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작가는 쳇 베이커의 전 생애를 뛰어난 글솜씨로 촘촘히 직조해 고통스럽고도 애달픈 그의 삶 속으로 독자를 초대한다.
2007년 을유문화사에서 처음 번역 출간된 쳇 베이커 전기는 『뉴욕 타임스』, 『다운 비트』 등 유수 매체로부터 가치를 인정받으며 가장 완성도 있고 믿을 만한 평전으로 지금껏 읽혀 왔다. 17년 만에 펴내는 개정판에는 이 책의 옮긴이이자 재즈비평가인 김현준의 해설이 새롭게 더해져 초판의 해설과 비교해 가며 읽는 재미가 있으며, 쳇 베이커의 음악을 즐겨 듣는 많은 이들이 그렇듯 팬으로서의 딜레마가 온전히 느껴지는 진솔하고도 귀중한 글이라 할 수 있다.
1950년대 비트 세대의 황량하고 고통스러운 초상화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 이 책의 부제이기도 한 〈You Can’t Go Home Again〉은 돈 세베스키가 쳇 베이커를 위해 작곡한 슬픈 멜로디의 발라드곡으로, 외로움에 관한 더없이 처연한 고백이자 한 편의 드라마틱한 서사시다. 라흐마니노프의 교향곡 2번에서 테마를 빌려 왔고, 토머스 울프의 소설에서 따온 이 제목은 곧 쳇 베이커의 생애 전체를 투영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사회의 물질적 풍요와 제도적 억압 사이에서 비트 세대가 등장했다. 1950년대 젊은이들은 지금이 마지막 순간인 것처럼 살았다. 잭 케루악의 소설 『길 위에서』 속 주인공 딘 모리아티와 같이, 쳇 베이커는 그 어떤 인물보다 극단적으로 비트 세대의 생활양식을 몸소 실천했다. 내일을 위해 아주 적은 돈이라도 남겨 둬야 한다는 생각은 전혀 못 하고 연주로 번 돈을 모두 마약을 사는 데 썼다. 자녀를 돌보는 책임은 전적으로 여인들의 몫이었고 그 자신은 미국과 유럽 등지를 떠돌며 마약과 함께 아슬아슬한 삶을 이어 갔다.
무대에서의 연주와 마약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따라서 책에는 연주 장면만큼이나 쳇 베이커가 마약을 구하러 다니거나 마약으로 인해 곤경에 처하는 장면들이 쉴 새 없이 등장한다. ‘My Funny Valentine…’을 감미롭게 읊조리는 모습과는 실로 대조되는 자기 파괴적인 삶이었고, 자신뿐 아니라 가족과 가까운 지인들마저 비참함의 구렁텅이로 빠뜨리는 쳇 베이커의 행적은 〈You Can’t Go Home Again〉이라는 곡으로 대변되는 듯하다.
작가의 치열한 펜 끝에서 탄생한 쳇 베이커를 둘러싼 괴리
책에 포함된 도판 역시 쳇 베이커의 삶을 압축해 보여 주는 귀중한 자료다. 수많은 여성 팬들을 몰고 다니던 젊은 시절의 자신감에 찬 얼굴은 뒤로 갈수록 볼이 움푹 패고, 삶의 역경을 고스란히 새긴 듯한 거친 주름살로 뒤덮인다. 눈을 질끈 감고 트럼펫의 마우스피스로 힘겹게 숨을 불어넣는 모습은 독자에게 복잡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마치 ‘예술가의 삶’이란 공식이라도 있는 것처럼 뛰어나고 독창적이며 매혹적인 작품 세계와는별개로 펼쳐지는 그들의 사생활은 매번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고 때로는 돌이킬 수 없는 배신의 상처를 남기기도 한다. 쳇 베이커의 삶 역시 스피커를 타고 유유히 흐르는 아름다운 사운드와 같았다면 좋았겠지만, 한 권의 책에 집약된 이 뮤지션의 초상은 그 모든 것과 대척점에 놓인 채 우리 내부에 균열을 내고, 혼란을 불러온다. 어쩌면 삶이 그렇지 않기에 예술이 더 아름답게 빛나는지도 모른다. 작가의 치열한 펜 끝에서 탄생한 쳇 베이커를 둘러싼 괴리는 독자에게 어떤 깨달음을 주기에 충분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