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시고 싶어서 마신다, 재밌어서 마신다,
굳이 참지 않는다
“술을 마시면 감정이 무르익는다. 나는 술을 마시고 고조된 감정을 이야기에 넣는다. 맨정신일 때 내가 쓴 이야기는 멍청하기 짝이 없다.” 술꾼으로 유명했던 스콧 피츠제럴드가 생전에 한 말이다. 알코올홀릭답게 그의 소설 속에도 술 이야기가 가득하다. 실제로 『위대한 개츠비』는 음주가무가 난무하는 사치스러운 파티에 참석했던 경험에 영감을 얻어 쓰인 소설이고, 『밤은 부드러워』 역시 본격적으로 술 마시는 사람들이 나오는 소설이다. 이번 책의 제목이 『밤은 부드러워, 마셔』가 된 것은 술과 술 마시는 시간을 사랑하는 작가 한은형이 떠올릴 수 있는, 어쩌면 가장 자연스러운 연상 작용의 결과로 보인다.
오후 3시와 5시 사이의 술, 홍어무침과 소주, 다자이 오사무처럼 마시기, 도로시 파커의 진, 교양 없는 마티니, 하이볼이라는 흥분, 밤의 술 위스키와 코냑, 굴과 샤블리 등 단어만 들어도 침샘이 자극되고 잔을 들어 손목을 꺾고 싶게 만드는 이야기들이 한껏 펼쳐진다. 작가는 책을 읽다가, 영화를 보다가, 음악을 듣다가 혹은 날씨가 좋아서 술을 찾게 된다. 술을 마실 이유는 차고 넘치지만 작가 한은형은 대체로 마시고 싶어서 마신다. 그리고 참지 않는다. 술을 마셔서 건강을 해치는 것보다 술을 참는 데서 오는 스트레스가 건강에 더 해롭다고 믿기 때문이다. 재미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겠다는 그는 술로써 그 재미를 찾으려 앵두를 구하러 다닌다든가(앵두주를 담그려고!) 부산의 무역상에 전화해 보는 일도(오키나와 술인 아와모리를 구하려고!) 마다치 않는다.
밤을 나누고픈 이들에게 종알대는 솔직 담백한 글
“나의 밤을 나누고픈 사람에게 종알대는 느낌으로” 이 글들을 썼다고 고백하는 작가는 사소한 일상 속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술에 관한 모든 일화와 그만의 생각을 솔직하게 들려준다. 하루는 옥수수 껍질을 벗기다가 옥수수로 만든 증류주인 버번위스키 생각이 간절해진다. 하지만 집에 있는 위스키인 메이커스 마크 특유의 맛에 잘 적응이 되지 않아 하이볼로 만들어 마시다가 술에 물이나 음료, 얼음을 타는 걸 범죄라 여기는 위스키 근본주의자들에게 대해 생각한다. “평양냉면에 식초나 겨자 타는 걸 죄악시하는 분들과 위스키에 다른 것을 타는 걸 반대하는 분들이 만나면 말이 잘 통할까?” 어쨌거나 평양냉면에도 겨자와 식초를 타고, 위스키에도 이것저것 섞어 마시는 작가는 하이볼을 한 잔 맛있게 말아 오븐에 구운 옥수수와 함께 행복한 한때를 보낸다.
가리는 것 없이 모든 술에 호기심이 동하는 작가에게 각각의 술을 어떻게 다가올까. 와인은 말을 줄이게 하고 감각을 깨우는 술이다. 생각을 하게 하고, 느끼게 하고, 쓰게 하고, 읽게 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술 같지 않은 술이다. 칵테일은 묘미를 선물하는 술이다. 좋은 것끼리 섞는다고 늘 좋은 결과가 보장되지도 않고, 오히려 그다지 좋지 않은 것끼리 섞을지라도 놀라운 결과를 보게 된다는 점에서 칵테일은 뜻밖의 재미를 가져다준다. 샴페인은 작가에게 술이라기보다 일종의 의식에 가깝다. 그러한 의식에는 스스로에게 하는 의전이 필수다. 계획과 환대, 그리고 끓어오름이 있을 때 샴페인은 펑! 하고 터진다.
귀여운 삽화와 함께 읽는 작은 일탈의 경험
평소 귀엽고 유머러스한 그림들을 그려 온 윤예지 작가가 이번 책을 위해 15점의 삽화를 그려 주었다. 앵두가 된 다자이 오사무, 음바페와 생제르맹 리큐어, 표지를 장식하기도 한 굴 소믈리에와 굴 손님을 보다 보면 미소가 저절로 지어진다. “술잔에 가득 부어진 술이 마음에 찰랑이는 밤 (…) 우리 뒤에는 은빛 어둠이 휘장처럼 드리워져 있고” “밤과 부드러움, 그리고 마시라는 청유”(「에필로그」 중에서)가 잔뜩 배어 있는 작가의 글을 하나씩 읽어 나가다 보면 어느새 우리도 작가의 작은 일탈에 동참하게 된다. 밤은 어김없이 오고, 언제든 채울 수 있는 각자의 술잔이 앞에 놓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