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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실문고_

아구아 비바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 민승남

156쪽, 115*190mm, 13,500원

2023년 06월 20일

ISBN. 978-89-324-6138-0

이 도서의 판매처

문학의 경계를 허물어 버린 작가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가장 깊은 심연

리스펙토르를 소개할 때 가장 인기 있는 문구는 이렇다. “주의할 것. 리스펙토르는 문학이 아니다. 주술이다.” 그만큼 리스펙토르가 쓴 모든 글은 이상하고 열렬한 수수께끼에 휩싸여 있다. 하지만 『아구아 비바』는 그중에서도 가장 과감한 작품으로 꼽힌다.

이 작품의 내러티브는 단 한 줄로 요약할 수 있다. “화자가 ‘당신’을 향해 글을 쓰고 있다.” 그 외에는 아무런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다. 게다가 화자는 종종 그림을 그린다는 사실 외에는 자신에 대해서도 알려 주지 않는다. 화자와 ‘당신’이 어떤 사이인지도 정확히 알 수 없다. 심지어 이 정체불명의 화자는 종잡을 수 없는 문장들을 연이어 늘어놓고, 그 말들은 논리와 체계를 무너뜨리며 ‘살아 있는 물(Água Viva)’처럼 터져 나온다. 『아구아 비바』는 언어로 만든 홍수다. 보통의 인간이 살아가는 의미 혹은 세계는 이 지적 재해 속에 잠기고 만다.

그래서 많은 평론가와 독자들은 이 작품이 리스펙토르가 쓴 글 가운데 가장 급진적이고 난해하다고 입을 모은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아구아 비바』는 오늘날 리스펙토르를 사랑하는 팬들이 가장 아끼는 작품으로 꼽히고 있다(굿리즈닷컴에서 리스펙토르의 작품 중 독자 평점 1위). 그 이유는 이 작품이 가장 순도 높은 리스펙토르를 선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는 언어 너머의 세계를 탐구하면서도 그 과정을 기록할 때만큼은 소설적 구조를 일부 차용했지만, 『아구아 비바』에서는 예외적으로 그 틀을 완전히 부수어 버렸다. 즉 이 작품 속의 리스펙토르는 가장 자유로운 리스펙토르이고, 따라서 그 뒤를 쫓는 건 완전히 불가능하다.

오직 무방비하게
혹은 ‘피상적으로만’ 읽을 것

따라서 이 작품은 이해를 허락하지 않는다. ‘어렵다’는 의미가 아니다. 어렵다는 건 답이 존재하되 그걸 찾는 과정이 힘겹다는 뜻이다. 하지만 『아구아 비바』는 애초에 답을 갖고 있지 않으므로 어려울 이유조차 없다. 사람들은 이 작품에서 범신론적인 고뇌나 철학적인 사고를 발견했지만, 리스펙토르(정확히는 ‘이 책의 화자’)는 그런 생각들마저 하나의 대상으로 간주하고 마치 돌이나 풀을 바라보듯 가만히 관찰할 뿐이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의미는 증발하고 오직 대상 자체만이 남게 된다. 방금까지는 하나의 생각이었지만 이제는 하나의 덩어리에 가까워진, 따라서 보고 만지는 데에 더욱 특화된 그 무엇. 그래서 『아구아 비바』의 화자는 자신이 하는 말을 ‘피상적으로만 들으라’고 권한다. 문장을 이해하려 들지 말고 마치 색깔이나 소리를 느끼듯이 감지해 보라는 요청이다. 사고를 감각적으로 관찰하는 것이다.

리스펙토르는 이런 식으로 의미 바깥을 향하려 했고, 그녀의 생애 내내 지속되었던 그 바람은 지성이 아니라 어떤 본능에 따른 것이었다. 어느 인터뷰에서 왜 글을 쓰느냐는 질문을 받은 리스펙토르는 이렇게 되물었다고 한다. “당신은 왜 물을 마시나요?” 기자가 “목이 마르니까요”라고 대답하자 리스펙토르는 그 답을 정정했다. “물을 마시지 않으면 죽기 때문이죠.” 가장 순도 높은 리스펙토르는 그저 쏟아져 나오는 것이다.

『아구아 비바』를 사랑하는 독자들은 그 쏟아짐에 매료되었다. 이성의 방어를 천천히 무너뜨리며 육박해 오는 문학-같은-것, 여기서 의미는 내내 파괴되고, 리스펙토르는 그 폐허에 색깔과 소리와 향기와 맛에 관한 묘사를 심으며, 그러는 이유는 작가 자신도 알지 못한다. 그리고 그 이상한 무지無智에서는 다른 어떤 문학에서도 만날 수 없는 에너지가 새어 나온다. 리스펙토르가 말했듯, 그런 에너지는 어쩌면 비유로서만 묘사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비유 A: 1975년, 리스펙토르는 보고타에서 열린 제1회 ‘국제 주술 회의’에 주빈으로 참석했다. 그녀는 주빈 연설을 거절하는 대신 자신의 단편 「달걀과 닭」을 낭독했다. 객석을 가득 채운 마녀들과 주술사들, 마법사들은 조용히 그 소리를 들었다.

비유 B: 리스펙토르의 고향인 우크라이나를 비롯한 슬라브 문화권은 독특한 이야기 소재를 하나 갖고 있다. 같은 이름과 효능을 지닌 물질이 서로 다른 내용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것이다. ‘살아 있는 물’이라 불리는 그 물질을 훼손된 신체에 바르면 그 부위가 재생되고, 죽은 이를 그 물에 적시면 되살아난다.

비유 Z: 소설가 레슬리 제이미슨은 뉴요커에 기고한 어느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삶은 일단 텍스트가 되고 나면 다시는 몸을 가질 수 없게 된다. 대신에 그것은 영원히 살 수 있다.”
차례 없음

저자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1920년에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났고, 그해에 러시아 내전을 피해 이주를 결심한 가족과 함께 브라질로 갔다. 1933년에 헤르만 헤세의 『황야의 이리』를 읽고 작가를 꿈꾸기 시작했다. 법대에 진학한 뒤로도 문학 작업을 병행하다 1940년에 첫 단편을 발표했다. 법대를 졸업하고 신문 칼럼니스트로 일하다 1943년에 첫 장편 소설 『야생의 심장 가까이』를 발표했고, 이 작품을 통해 브라질 문단에 충격을 안겼다.
1944년부터 1959년까지 외교관이던 남편과 함께 유럽과 미국 등지를 오가며 작품 활동을 이어 갔지만, 이후로는 남편과 갈라서고 자녀들과 함께 브라질로 돌아와 여생을 보냈다. 귀국한 뒤로는 화재를 겪으며 큰 화상을 입는 등 생활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꾸준히 작품 활동을 이어 갔다. 57세 생일을 앞두고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난소암으로 사망했다.
생전에 마지막으로 쓴 대표작 『별의 시간』을 비롯해 『G.H.에 따른 수난』, 『아구아 비바』 등 그녀가 남긴 많은 작품은 21세기 들어 브라질 바깥에서도 재조명되며 선풍을 일으켰다. 이때 그녀의 작품을 주도적으로 번역하고 편집한 벤저민 모저는 그녀를 카프카 이후 가장 중요한 유대인 작가로 꼽았다.

역자

민승남

서울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현재 전문 번역가로 활동중이다. 2021년 『켈리 갱의 진짜 이야기』로 제15회 유영번역상을 수상했다. 옮긴 책으로 『지복의 성자』, 『시핑 뉴스』, 『넛셸』, 『솔라』, 『데어 데어』, 『바퀴벌레』, 『스위트 투스』, 『사실들』, 『빌리 린의 전쟁 같은 휴가』, 『상승』, 『사이더 하우스』, 『그 부류의 마지막 존재』, 『별의 시간』, 『서쪽 바람』, 『죽음이 물었다』, 『한낮의 우울』, 『천 개의 아침』, 『밤으로의 긴 여로』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