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은 죽었는가?
위대한 평론가 테리 이글턴의 최신작
50년 넘게 ‘비극’을 탐구한 노비평가의 결실
이 책은 영국의 저명한 문학 비평가 테리 이글턴이 고대 그리스부터 현대까지 비극의 시작과 발전 과정을 통해 해당 장르에 대한 새로운 설명과 비극의 근본적인 위치를 추적한 책이다. ‘비극’은 저자가 대학생 때부터 지금까지 반세기가 넘도록 오랫동안 관심을 가져온 연구 주제이며, 이 책은 『우리 시대의 비극론』 이후 17년 만에 선보이는 비극 예술론이다. 전작에서 더욱 발전된 이야기를 300쪽이 안 되는 분량에 집약적으로 담아내고 있다.
이글턴은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비극의 의미와 이 장르가 여전히 필요한 이유, 그리고 비극 자체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등을 논하는데, 이를 위해 아리스토텔레스, 헤겔, 니체, 발터 벤야민, 슬라보예 지젝 같은 여러 철학자와 문학 비평가들이 바라본 비극의 이야기를 가지고 온다. 또한 고대의 소포클레스, 아이스킬로스부터 현대의 셰익스피어, 입센에 이르기까지 주요 비극 작가의 작품들을 통해 역사적 과도기와 비극의 연관성을 면밀하게 검토하면서 비극의 정치적 성격까지 살펴본다.
책 전반에 걸쳐 있는 비극에 관한 풍부한 사례와 지적인 고찰은 테리 이글턴의 필력과 식견을 가늠하게 하고, 그의 기지 넘치는 발언은 책의 재미를 살린다. 비극에 관한 문학 비평서이자 인문서로서 손색이 없는 저서다.
고대 그리스부터 현대까지
문학과 정치, 철학과 연극 등을 총망라한 비극 예술론
테리 이글턴은 “비극은 죽었는가”라는 도발적인 질문으로 논의를 시작한다. 신과 인간의 관계 사이에서 빚어지는 갈등을 다루는 고대 비극은 세속적 가치, 계몽된 정치, 인간의 이성, 우주에 대한 지식을 믿는 시대에는 살아남기 힘든 정신이 되었지만, 적어도 20세기까지는 활기를 유지했다. 저자는 고대 비극의 영웅들이 천국을 보상으로 약속받았다면 아무것도 약속받지 못한 근대 비극의 영웅들은 고대보다 더욱 비극적인 인물이라 주장한다. 오늘날 비극의 주체는 역사적 조건이 아니라 개인의 내면적 이유로 바뀌었으며, 비극적 개인주의가 찬미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근대적인 여러 요소는 비극을 좌절시키기보다는 오히려 촉진시키는 촉매제 역할을 했다. 즉, 소멸된 비극 정신은 고대 그리스부터 내려오는 전통 관념일 뿐, 현재는 새로운 비극적 요소로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저자의 시선은 비극의 대명사인 『오이디푸스 왕』의 주인공 오이디푸스의 인물 분석에서도 도드라진다. 저자는 오이디푸스를 범죄자와 재판관, 왕과 거지, 원주민과 이방인, 죄악과 천진함, 성스러움과 저주 등의 양면적 속성을 지닌 인물로 평가한다. 이것은 그의 자아가 여러 존재로 나뉠 수 있는 불안정한 존재라는 것을 뜻한다. 이를 통해 고대 비극을 대표하는 인물인 오이디푸스는 ‘불안정한 수많은 자아’를 지닌 인물로 평가받을 수 있다.
이외에도 여러 철학자의 시각을 빌려 다양한 관점에서 비극을 논한다. 나아가 비극의 생사 문제를 넘어 철학, 미학, 종교, 정신분석 등을 비롯한 여러 인문학적 시선으로 바라보며 시대마다 각각의 분야와 비극이 연결되는 방식을 탐사한다.
역자 정영목은 “비극은 죽었는가”라는 이글턴의 질문은 “아마도 비극이 지금 우리가 사는 곳의 중심 문제를 감당하고 있느냐” 하는 의미일 것이라고 해석한다. 나아가 “결국 밝은 미래를 약속하며 출발했던 근대가 빚어 놓은 이 참담한 현실, 이 비극적 상황을 인간이 이해하고 수용하고 넘어서려는 다양한 정신적 노력을 비극이라는 렌즈로 들여다보려는 시도”가 이 책이 아니겠느냐고 반문한다.
비극은 지금 우리가 사는 곳의 중심 문제
비극이라는 렌즈로 들여다보는 인간과 사회
고대 그리스의 대표적인 비극 작가 아이스킬로스부터 헤겔에 이르기까지 여러 극작가와 철학자는 비극과 인간이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오랫동안 유지해 왔다고 말한다. 이 책은 이러한 인간이 지닌 한계에서 필연적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비극에 관한 담론을 논의한다는 점에서 문학 비평서를 넘어 철학서이자 인문서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책을 읽다 보면 “매우 추상적이고 딱딱하고 까다로운 이야기를 하는 듯하지만, 저자 자신의 상처가 아무는 법이 없는, 타인의 상처에 같이 아파하는 내밀한 속내가 은근히 드러난다”. 그래서 역자는 책 속의 “문장들을 한 줄 한 줄 음미하다 보면, 문득 이게 혹시 ‘위로할 수 없는 자’를 위로하려고 쓴 책이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고 말한다. 그만큼 이 책은 단순히 비극을 탐구하고 논하는 연구서를 넘어, 오늘날 일상에서 늘 비극을 접하고 견뎌내야 하는 현대인들에게 사유와 위로의 시간도 선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