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3대 비극 작가
에우리피데스의 대표작
이 책은 소포클레스, 아이스퀼로스와 더불어 그리스 3대 비극 작가로 꼽히는 에우리피데스의 걸작을 모은 선집이다. 본 도서에는 그의 대표작인 「알케스티스」·「메데이아」·「힙폴뤼토스」가 실려 있다. 작품 속의 주인공들은 자기 내면의 갈등을 인식하고 심리적인 동기와 논리적인 의사 결정을 내리는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성향은 남편 아드메토스를 대신해 죽었지만 헤라클레스의 도움으로 환생하는 알케스티스, 사랑을 위해 아버지와 조국을 배반했지만 끝내 자신에게 등을 돌린 이아손에게 복수하는 메데이아, 계모 파이드라 때문에 모함을 받아 추방당한 뒤 죽게 되는 힙폴뤼토스의 이야기에 생생히 묘사되어 있다.
에우리피데스의 비극은 소포클레스와 아이스퀼로스의 작품과 비교하면 제우스의 섭리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고, 아폴론의 신탁도 의심스러운 것으로 나타나는 점이 이채롭다. 후기 작품으로 갈수록 그의 비극은 신의 섭리보다 우연이 인간사에서 결정적 역할을 한다. 신들도 이성적인 섭리와 질서를 구현하기보다는 인간의 모습으로 분노하며 복수심에 불타는 파괴적 힘을 선보인다. 이들 신과 마찬가지로 비극의 주인공도 분노나 애욕 같은 감정에 사로잡힌 나머지 마땅히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면서도 실천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또한 서로 상반되는 가치가 충돌하는 상황에서 특정한 가치를 선택하여 행위하는 모범을 보여 주지만 이로 인해 다른 가치를 부정함으로써 경고의 모델이 되는 역설적인 캐릭터를 보여 준다.
에우리피데스만의 또 다른 특징은 바로 연극 무대에 기계 장치로 만든 신을 등장시키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 기법인데, 이번 책에도 결말 부분에 이런 장면을 볼 수 있다.
세기를 뛰어 넘어 살아남은
가장 비극다운 비극
이 책의 첫 번째 수록작인 「알케스티스」는 신부인 알케스티스가 신랑인 아드메토스를 대신해 죽는 민담이 극화된 작품이다. 여주인공인 알케스티스는 가정을 구하고 국가 안녕을 도모하기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전형이자 모범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아드메토스는 아내를 대신 죽게 함으로써 자기 목숨을 보전하는 이기적이고 비겁한 캐릭터다. 하지만 알케스티스가 어떤 강요로 죽음을 선택한 것도 아니고, 아드메토스의 죽음이 가정의 불행과 국가의 붕괴를 야기하기에 왕 대신 죽을 사람이 절실했다는 정황을 외면하기는 어렵다. 아울러 아드메토스는 아내를 대신 죽게 하여 비겁자란 오명을 쓰고 더 큰 불행을 겪으면서 정신적 성장을 경험하게 된다.
두 번째 수록작인 「메데이아」에서 이아손은 비열한 인간으로 그려지고 동시대 소피스트의 모습을 담고 있다. 반면 야만족 공주이며 이방인인 메데이아는 호메로스 서사시의 남성 영웅처럼 명예 중심의 가치관에 따라 행동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이처럼 영웅 이아손과 이방인 메데이아 사이에서 가치의 전도가 일어난 것이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이다. 물론 메데이아가 행하는 복수는 인륜을 저버린 끔찍한 행동으로 비판받아 마땅하지만 그것은 메데이아가 처한 상황에서 불가피한 행동이고, 손상된 명예를 회복하고 맹세의 정의를 다시 세울 수 있는 길로 그려진다. 메데이아는 그리스 시대 영웅의 가치관, 즉 명예를 손상한 적에게는 반드시 복수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바라보면 복수의 전형이자 모범이라 할 수 있다.
마지막 작품인 「힙폴뤼토스」는 본래 ‘화관을 쓴 힙폴뤼토스’로 불리는 희곡인데 에우리피데스가 파이드라와 힙폴뤼토스 신화를 소재로 두 번째로 극화한 것이다. 첫 번째로 극화한 작품인 「베일에 싸인 힙폴뤼토스」는 오늘날 전해지지 않는다. 아리스토파네스의 설명에 따르면, 첫 번째 작품에 나타난 여러 부적절하고 비난받을 점을 두 번째 작품에서 수정했다고 한다. 이 “부적절하고 비난받을 점”이란 파이드라가 직접 힙폴뤼토스를 유혹하는 행동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힙폴뤼토스는 아르테미스 여신만을 경배하고 아프로디테 여신은 경배하지 않는다. 이에 분노한 아프로디테 여신은 파이드라가 양아들 힙폴뤼토스를 사랑하게 한 뒤 아버지인 테세우스에게 이 사실을 알리는 방법으로 힙폴뤼토스를 응징하고자 한다. 결국 힙폴뤼토스는 아르테미스 여신의 순결을 숭상하고 실천하는 모범을 보이지만, 아프로디테 여신이 상징하는 우주적 원리를 무시하는 잘못을 범해 비극적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이를 통해 에우리피데스는 두 가지 이념 사이에서 중용을 취하지 못하고 파멸하는 인간의 한계를 보여 준다.
이처럼 책에 수록된 세 작품은 시대를 뛰어넘어 인간 본연의 한계와 비극성, 희로애락을 여실히 보여 준다는 점에서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