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를 대표하는 영화감독의 초상이자,
한 시대를 풍미한 예술가들과 그 우정의 회고록
보름달 위로 구름이 흐르고, 눈동자가 면도날에 찢긴다. 세계 영화사에서 가장 충격적인 장면으로 회자되는 <안달루시아의 개> 이래, 루이스 부뉴엘은 언제나 논란과 열광의 중심에 선 시네아스트였다. 신랄한 유머와 초현실적인 영상 언어를 구사했던 그는 <잊혀진 사람들>, <비리디아나>, <세브린느>,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 등으로 국제적 명성을 얻었고, 마지막 작품인 <욕망의 모호한 대상>에 이르기까지 부당한 권위에 대한 조롱을 멈추지 않았다.
부뉴엘은 이 책에서 마치 마지막 숨결을 토해내듯 삶을 돌이킨다. 살바도르 달리,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앙드레 브르통, 막스 에른스트, 찰리 채플린 등 자신의 삶에 한때 등장했던 수백 명의 예술가들을 공들여 호명하고, 그 우정과 교유의 의미를 곱씹는다. 예술가와 시인의 친구로서, 초현실주의자, 무신론자, 쾌락주의자로서 충실한 삶을 살았던 거장의 초상은 그렇게 한 시대의 증언으로 거듭난다.
“절대로 관객을 지루하게 해서는 안 된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루이스 부뉴엘의 예술적 여정
루이스 부뉴엘의 생애는 20세기와 운명을 함께한다. 1900년 2월 22일 스페인 아라곤의 부농 가문에서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비상한 기억력과 예민한 기질을 지닌 소년이었다. 영화가 시장통의 구경거리에 불과했던 시절, 조르주 멜리에스의 <달나라 여행>과 이탈리아 멜로드라마, 전성기의 그레타 가르보, 낯설기만 한 온갖 영화 기법이 어린 부뉴엘을 사로잡았다.
그가 본격적으로 영화에 빠져든 것은 1925년 파리에 체류하면서부터다. 하루에 세 번씩 영화관에 드나들며 비평문을 썼던 부뉴엘은 에이젠슈테인과 프리츠 랑, 무르나우의 작품에 매료되어 영화 만들기에 대한 열망을 키워 간다. 그로부터 4년 뒤인 1929년, 그는 친구 살바도르 달리와 함께 데뷔작 <안달루시아의 개>를 선보인다. 파리 예술계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킨 이 영화를 통해 그는 초현실주의 운동의 일원이 된다. 그러나 지나치게 이상을 추구했던 초현실주의는 오래 가지 못했다. 스페인 내전과 어지러운 국제 정세에 휩쓸린 부뉴엘은 할리우드의 대형 스튜디오와 뉴욕 현대 미술관을 전전하며 제작자와 편집 담당자, 감독의 일을 바삐 오간다. 그 시절 부뉴엘에게 영화는 생계 수단이었다. 멕시코에 정착한 뒤에는 몹시 열악한 조건 속에서 여러 편의 영화를 만들어야 했지만, 그에겐 거리낄 것도 부끄러울 것도 없었다. 그저 할 수 있는 일을 해낼 뿐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스페인으로 귀환한 부뉴엘은 국제 무대에서 <비리디아나>를 공개한다. 이 영화는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떠올리게 하는 반기독교적 장면으로 논란을 일으켰으나, 평단의 열렬한 지지로 1961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게 된다. 그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부르주아 여성의 성적 욕망과 백일몽을 묘사한 <세브린느>로 베니스 영화제 최고상인 황금사자상을, 폐쇄적이고 속물적인 부르주아지 사회의 속성을 초현실적으로 표현한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으로 아카데미 국제영화상(현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한다. 1983년 멕시코시티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기까지, 부뉴엘은 예술가로서 누구보다 자유롭고도 치열한 삶을 살았다.
“내 기억으로 이루어진 나의 초상”
이토록 사랑스럽고 유머러스한 몽상가의 자화상
이 책은 루이스 부뉴엘이 구술한 그의 생애를 각본가 장클로드 카리에르가 정리해 완성한 반半자서전이다. 부뉴엘의 영화처럼 신랄한 농담과 흥미진진한 아이디어로 가득한 이 책에서 그는 특히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의 목록을 힘주어 열거한다. 즐겨 가던 마드리드와 뉴욕의 바, 영감의 원천이 되는 드라이마티니와 포도주, 자신의 이름을 딴 칵테일 ‘부뉴엘로니(부뉴엘식 네그로니)’에 대해 장광설을 늘어놓는 한편, 곤충학자 장 앙리 파브르와 사드 후작, 안제이 바이다와 프리츠 랑의 영화, 피카레스크 소설과 러시아 문학 등 분야와 장르를 넘나드는 이름과 작품들을 언급하며 깊은 관심과 애착을 고백한다.
“루이스 부뉴엘을 따라가는 길은 길을 잃는 방법에 능수능란해지는 것이다.” 영화 평론가 정성일의 애정 어린 헌사다. 이 책에는 오직 부뉴엘 자신만이 발설할 수 있는 추억과 낭만, 비밀스러운 꿈과 환상, 오래 곱씹었던 영화와 책, 사랑과 우정의 이야기가 자유분방하게 펼쳐져 있다. 난무하는 갈림길과 우회로 속에서, 한 예술가의 가장 진솔한 자화상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