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카소도 질투한 천재 조각가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생애와 작품 세계
천재 화가로 꼽히는 피카소가 유일하게 질투했던 예술가, 20세기 가장 중요한 조각가이자 현대 조각의 거장인 자코메티는 작가보다 작품이 유명한 몇 안 되는 예술가다. 생동감 있는 육체를 표현한 기존의 조각과 전혀 다른, 앙상하지만 힘이 느껴지는 그의 조각들은 세상에서 가장 비싼 현대 미술 작품이기도 하다. 그의 작품들은 입체파와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받았으며, 실존주의적 논쟁과 인간 존재에 대한 철학적 질문 또한 그의 작품에서 큰 역할을 했다.
이 책의 저자는 직접 자코메티의 모델이 되면서 그와의 작업 과정을 기술한 『작업실의 자코메티』를 내기도 했다. 본서에서는 전작보다 실존의 딜레마를 초월한 그의 초현실적이고도 실존주의적인 작품 세계를 좀 더 면밀하게 분석한다. 뿐만 아니라 자코메티 개인의 삶도 깊숙이 들여다본다. 가족과 아내, 애인과 뮤즈로 군림했던 여성들과의 관계는 물론 당대 중요한 예술가, 사상가, 미술 딜러 등과 만나고 교감하고 때론 어긋나는 과정도 그려진다.
저자는 무려 15년간에 걸쳐 이 풍부하고 깊은 일대기를 완성했다. 그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에 대한 탐색’의 예술적 경지를 보여 주었던 자코메티의 생애를 담은 이 전기는 의미 없이 모호하고 난해한 혹은 생명력 없이 일회적 아이디어로 생산되는 현대 미술의 흐름 속에서 예술가로서의 진실성과 흔들리지 않는 창조 정신을 되새겨 보는 뜻깊은 계기가 될 것이다.
“내가 원하는 것은 다만 맹렬하게 전진하는 것이다”
인간적 고뇌와 예술에 대한 열정으로 점철된 생애
스위스 고산지대인 스탐파에서 자란 자코메티의 예술적 정신을 형성하는 데는 후기 인상파 화가였던 아버지의 후원과 어린 시절 경험했던 스위스적 감성, 그리고 평생의 동료였던 남동생 디에고가 밑거름이 되었다. 그는 1919년 제네바의 미술 공예 학교에서 조각과 드로잉 수업을 받던 중 1920년 당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미술 이벤트였던 베네치아 비엔날레의 스위스 사절단에 속했던 아버지와 함께 이탈리아로 가서 틴토레토와 조토 같은 화가와 아프리카, 이집트의 고대 미술에서 커다란 예술적 자극을 받았다.
19세가 되던 해 다시 이탈리아로의 여행을 결심했던 자코메티는 여행 동반자였던 반 뫼르스 노인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바로 곁에서 목격하면서 삶과 죽음 사이의 공포, 즉 존재에서 비존재로 옮겨지는 순간에 연약하고 불확실하며 덧없어지는 존재의 문제를 고민하게 된다. 양차 세계 대전이 안겨 준 심원한 갈등과 불안 역시 그의 예술 세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이런 경험은 후일 허무의 공간과 연계된 인체 조각상을 만드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1922년 파리에 정착한 자코메티는 인간의 극한적인 모습, 즉 그가 경험했던 죽음으로의 접근, 공허 속의 인간, 에로스적인 이미지 등이 재현된 작품을 통해 1930년부터 1935년에 걸쳐 대표적인 초현실주의 작가로 널리 인정받았다. 이후 그는 초현실주의와 결별하고서 자신만의 스타일을 확립함으로써 미술사에 독보적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부와 명예를 얻고도 소박한 은둔자의 삶을 살았던 자코메티는 평생 초라한 작업실에서 만성 피로와 위암 등에 시달리면서도 작품에만 몰두했다. 부스스하게 헝클어진 머리와 깊게 파인 주름, 담배로 인해 거칠어진 피부는 그 열정의 흔적이기도 했지만 육체적 한계의 징조이기도 했다. 결국 자코메티는 1966년 1월 11일 숨을 거두었다.
“예술은 매우 흥미롭지만 진실은 엄청나게 더 흥미롭다”
실존의 고독을 집요하게 응시한 조각가
자코메티는 보이는 그대로의 사실성에 근거한 모사가 대상의 전체와 본질을 대변할 수 없다는 한계를 느끼고, 기억과 상상에 의존한 입체파적인 작업을 시도했다. 사물이 그에게 주는 내적인 비전을 상징적인 오브제에 의해서 표현하는 자코메티의 작업은 점점 더 인간적 현실의 심연으로 파고들었다.
한때 초현실주의 집단에 속했으나 그는 어떤 미술 사조나 이념에 소속되거나 당대의 사상 체계를 표현하고 설명하려고 했던 인물이 아니었다. 오직 그가 천착했던 것은 예술에 대한 진실, 즉 눈에 보이는 그대로의 실체와 현실에 대한 인상을 포착해 내기 위한 끊임없는 예술적 탐구와 시도였다. 눈에서 곧 사라지고 마는 실재의 본질을 표현하기 위해 깎고 깎다가 성냥개비만 해졌다가 때로는 먼지가 되어 버리는 것은 그의 조각뿐만이 아니라 그 자신이기도 했다. 불가능한 것에 대한 도전, 완성에 다가가기 위한 끊임없는 실패와 노력은 결국 새로운 조형 언어의 창조로 이어졌다.
부피도 무게감도 없는 길고 가느다란 형상은 위태로운 현실에 처한 인간의 실체를 그 어떤 예술보다도 적확하고 신비롭게 보여 주는 자코메티만의 스타일이 되었다. 이와 같은 자코메티의 작품 세계는 당시 전후의 혼란과 맞물려, 실존의 고독과 불안을 표현한 ‘실존주의적 실체를 담은 예술’로서 현대 조형미술사상 가장 뛰어나다고 평가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