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드대학교 인간진화생물학과 교수 리처드 랭엄이 풀어 가는
인간 본성에 관한 가장 도발적이고 매혹적인 이야기
고고학에서 사회사상까지, 다양한 논의와 최신 연구를 넘나들며
인간의 관용과 폭력성의 수수께끼에 다가가다
히틀러는 채식주의자이자 반려견 블론디를 사랑했고 블론디가 죽었을 때 슬픔에 잠겼던 동물 학대 혐오자였다. 스탈린은 18개월 동안 교도소에 있으면서 항상 놀랍도록 조용했고 절대 소리 지르거나 욕을 하지 않았다. 그는 모범수였고 정치적인 편의를 위해 수백만 명을 학살할 사람으로 보이진 않았다. 이렇듯 아주 악한 사람도 유순한 면이 있지만 우리는 그들의 악행을 합리화하게 될까 봐 그들이 친절했다는 것을 강조하는 데 주저하게 된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인간에 관한 매우 중요한 사실을 파악할 수 있다. 바로 인간은 가장 악한 종이기도 하고 가장 선한 종이기도 하다는 사실이다. 하버드대학교 인간진화생물학과 교수이자 저명한 진화인류학자인 리처드 랭엄은 이 책에서 이러한 ‘역설적’인 인간의 본성에 대한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진화론적 탐구를 바탕으로 고고학, 고생물학, 심리학, 생화학, 신경생리학, 발생학, 뇌과학, 해부학, 근대 사회사상, 형법학 등을 넘나들며 우리의 어제와 내일을 흥미진진하게 가로지른다.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이자 주목해야 할 지점은 인간이 선천적으로 선하거나 악하다는 이분법적 입장의 한쪽에 서는 대신 인간은 선천적으로 선한 ‘동시에’ 악하다는 인간 본성의 역설을 고스란히 끌어안는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에 대해 독창적이고 도발적이면서도 설득력 있는 답변을 내놓는다. ‘자기 길들이기’, ‘반응적 공격성’, ‘주도적 공격성’ 등 흥미로운 개념과 풍부한 연구를 바탕으로 인간의 폭력과 이타주의, 전쟁과 협력, 사형과 도덕 등의 중요한 주제들에 다가가는 이 책은 궁극적으로 인간이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갈지에 대한 중요한 질문을 독자에게 제시하고 있다.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우리 자신, 그리고 우리의 과거와 미래를 보는 방식이 달라지는 의미 있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우리 본성을 이해하기 위한 두 가지 공격성
다른 영장류와 비교할 때 인간은 일상생활에서 매우 낮은 수준의 폭력을 행사하지만, 전쟁 폭력으로 인한 사망률은 매우 높다. 인간 사회에서 전쟁은 수십 년 동안 일어나지 않을 수 있지만, 다시 시작되면 인간은 침팬지나 다른 영장류보다 더 빠른 속도로 서로를 죽인다. 저자는 인간에게서 나타나는 이런 불일치를 가리켜 ‘선함의 역설’이라 명명하며, 이 책 전체를 통해 이런 역설의 수수께끼를 풀어 간다. 저자는 이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서는 공격의 두 가지 종류인 ‘반응적 공격’과 ‘주도적 공격’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반응적 공격은 어떤 자극이나 위협에 대한 즉각적이면서 감정적인 반응으로, 화를 버럭 낸다든지 몰아세우는 것과 같이 ‘화끈한’ 형태이며, 주도적 공격은 특정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목표 지향적 공격으로, 계획적이고 정교한 ‘냉정한’ 형태다. 인간은 아주 특이하게도 반응적 공격성이 상대적으로 낮은 성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회적 관용을 베풀며, 동시에 주도적 공격성이 높은 성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악하고 치명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때로는 더없이 관대하고 때로는 한없이 사악한 것이다. 어떻게 이런 상반된 경향을 발전시켜 왔는지 더듬어 보기 위해 저자는 인간의 ‘자기 길들이기’라는 개념을 통해 흥미로운 진화적 탐험을 떠난다.
인간의 관대함에 숨겨진 비밀을 밝히다
‘길들이기’는 특정 동물 종에서 공격성이 줄어들고 참을성이 증가하는 과정을 가리키며, ‘자기 길들이기’란 인간이 인위적으로 개입하지 않아도 야생 동물이 공격성이 줄어드는 등의 ‘행동 변화’와 두개골 크기 감소 등의 ‘신체의 변화’를 나타내는 것이다. 저자는 인간 또한 이런 자기 길들이기 과정을 거쳤다고 이야기한다. 말하자면 인간이 자기 길들이기를 통해 사회화되었으며, 스스로 덜 공격적인 방향으로 동물적 본성을 억제해 왔다는 것이다. 우리 조상은 지금의 우리보다 덜 유순했다. 그들은 쉽게 이성을 잃었으며, 더 빠르게 위협했고, 서로 싸웠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는 그들보다 훨씬 더 많은 사회적 관용성을 보여 준다. 저자는 과거의 늑대와 같았던 우리 조상의 행동이 현재 인류에게 이르러 개와 같이 변했다고 말한다. 이런 길들이기 과정에서 우리는 해부학적인 변화를 겪었다. 50만 년 전 우리 조상들은 지금의 우리보다 몸이 더 무거웠으며, 더 돌출되고 남성적인 얼굴, 더 큰 뇌를 가지고 있었고, 남성이 여성보다 상대적으로 더 컸다. 저자는 이러한 많은 근거를 바탕으로 인간은 길들이기되었으며, 반응적 공격을 덜하는 방향으로 진화했다고 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가 반응적 공격성에 대항하는 방향으로 진화해 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으로 사형을 드는데, 공격적이고 법을 어기는 사람들이 사형을 통해 사라지면서 길들이기가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사형은 수렵 채집 사회, 농업 혁명, 국가의 발생을 통해 제도화되어 인간 사회 안에서 이타주의, 협력, 친사회성, 질서, 도덕이 탄생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언어 능력의 발달은 소문에서 살인에 이르는 여러 사회적 통제 도구들이 기능할 수 있게 했던 호모 사피엔스의 중요한 특징이었다. 즉 우리가 다른 개인을 얼마나 원망하고 있는지 표현하는 능력, 그리고 원망의 대상을 향해 과감한 행동을 하겠다고 말하고 협의하는 능력이 적어도 수천 세대 동안 인간 유산의 일부로 자리 잡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적 통제의 힘은 새로운 종류의 지배를 가져왔다. 그러나 저자는 우리의 진화에서 사형이 한 역할을 인지하는 것이 우리가 오늘날에도 사형을 수용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라고 말한다. 국가 권력에 의한 사형 집행은 소규모 사회에서의 사형과 다르며, 무고한 사람이 종종 사형당하는 일이 생길 수 있다는 점을 인지하고 모든 국가가 조만간 사형을 폐지하기 바란다는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보여 준다.
전쟁은 인간의 숙명?
폭력성의 이면을 들여다보다
몇몇 동물 종을 보면 보통 주도적 공격을 많이 하는 경향은 일반적으로 반응적 공격을 많이 하는 경향과 관련이 있다. 침팬지는 다른 집단 구성원들에게 주도적 공격을 많이 사용하며, 공동체 내에서는 반응적 공격을 많이 사용한다. 늑대는 자기 종족에 대한 주도적 공격을 자주 하는 치명적인 육식동물이다. 침팬지와 마찬가지로 일반적으로 늑대 무리들의 관계는 온화하고 협조적이지만, 개처럼 평온하지는 않다. 그런 종들에서는 주도적 공격과 반응적 공격이 대략 비슷하게 높은 수준으로 발생한다.
하지만 인간 종에서는 다른 일이 일어났다. 반응적 공격이 억제되었고 주도적 공격이 높게 유지되었다. 30만 년 전에 호모 사피엔스가 처음으로 출현하고, 20만 년 전에 자기 길들이기 과정이 시작되면서 인간은 낮은 반응적 공격성을 지니는 방향으로 진화해 왔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 조상들이 가지고 있던 주도적 공격성은, 특히 ‘연합’이라는 형태로 계속 이어져 왔다. 홍적세(약 258만 년 전부터 1만 년 전까지의 지질 시대) 때 호모속이 진화하는 과정에서 인지 능력이 증가하고, 특히 언어 능력의 충분한 발달로 인해 주도적 연합 공격이 집단 내에서 선택적으로 수용됐을 가능성이 크다. 우리는 정교한 계획하에 연합을 형성하여 공격할 수 있다. 이런 주도적 연합 공격은 처형, 전쟁, 학살, 노예 제도, 약탈, 고문, 린치, 정치적 숙청 같은 권력의 남용을 낳았다. 특히 전쟁은 인간이 보여 주는 주도적 공격성의 가장 극단적인 예다.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과학의 대답
우리 자신, 그리고 우리의 과거와 미래를 보는 방식을 통째로 바꿀 책
흔히 우리는 인간의 분열된 성격들 중 한쪽만이 우리의 본성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저자는 우리가 본성적으로 ‘천사’ 같고 ‘악마’ 같은 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것을 다양한 근거를 통해 합리적으로 보여 주며, 나아가 이를 염두에 둘 때 우리의 미래에 대한 진정한 숙고가 가능하다고 이야기한다. 저자는 맹목적인 낙관론은 냉담한 비관론만큼 어리석은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전쟁이 진화했다는 생각과 전쟁이 불가피하다는 생각은 동일하지 않다는 것을 강조한다. 전쟁이 진화한 것은 우리가 위험한 종이라는 것을 의미하므로 군사주의 철학의 발흥, 지나치게 낙관적인 평화주의의 확산, 권력의 남용을 억제하기 위한 강력한 제도와 참여가 필요하다.
인류는 평화에 대한 욕구와 권력의 유혹 사이에서 흔들리면서 폭력으로 인한 사망률을 줄였지만, 핵 홀로코스트의 위험이 높아졌다는 모순에 직면해 있다. 우리는 때때로 협력이 가장 가치 있는 목표라고 생각하지만 그것 또한 도덕과 마찬가지로 선하거나 악할 수 있다. 인간의 중요한 목표는 협력의 장려가 아니라, 조직적 폭력을 휘두를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을 감소시키는 것이다. 저자의 말처럼 우리는 이 과정을 시작했지만 갈 길은 멀다. 이 책은 이렇듯 우리의 모습을 똑바로 직시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며, 이를 바탕으로 우리의 미래를 숙고해 볼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인간이 양면적인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하게 느끼고는 있지만 그 근원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없었던 독자들에게 이 책은 무엇보다 명료하고 합리적으로 그 역설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어떤 미래를 상상할지는 우리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