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시를 공부하기 위하여 『고문진보』를 보통 6백 번씩 읽으면서 암송하는데, 나도 몇백 번을 읽고 암송하게 되었고, 그 뒤로는 한결 시를 쉽게 지을 수 있었다. ― 퇴계 이황
도연명, 이백, 백거이, 왕희지, 소식 등 대가들의 명문장이 한자리에
‘옛글 가운데서 참된 보물’만을 모은 고전 중의 고전
우리나라에서 사서삼경 다음으로 많이 읽힌 문장의 보고
『고문진보』는 중국 전국 시대에서 당송 시대까지 시와 문장으로 유명했던 작가들의 작품을 모은 책으로, 전집에는 시가류가, 후집에는 산문류가 수록되어 있다. 동양의 보편적 문학 세계와 정서를 충실히 드러내고 있어 15세기 이후 우리나라에서 사서삼경 다음으로 가장 많이 읽힌 한문 문장 교과서로 알려져 있다. 이번에 ‘을유사상고전’ 시리즈의 일환으로 발간되는 『고문진보』는 2001년(전집)과 2003년(후집)에 발간되어 동양 고전 번역의 새로운 전범을 보여 준 『고문진보』 역주의 3판이다. 이번 개정판에서는 전집과 후집의 체제 불일치를 한 차례 더 수정, 보완하였으며, 오자와 오기 등을 바로잡고 디자인과 편집 면에서 한층 더 현대적인 감각을 보여 준다. 이번 『고문진보』 3판의 발간은 값진 고전을 지속적으로 완성도 있게 소개하겠다는 을유문화사의 견고한 의지를 보여 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한글세대를 위한 이 번역서는 모든 한자에 음을 달고 풀이는 알기 쉽게 해 한문에 낯선 독자들도 문장의 정취를 충분히 음미하며 읽을 수 있도록 하였으며, 독자들이 각 문장에 담긴 의미와 배경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전고나 예문 등을 담은 상세한 주석을 달아 놓았다. 도연명의 「돌아가리(귀거래사)」, 제갈량의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기에 앞서 올린 상소문(출사표)」, 굴원의 「어부와의 대화(어부사)」, 왕희지의 「난정에서 지은 글의 서문(난정기)」, 소식의 「적벽대전 유적지에서 처음 지음(적벽부)」 등 그야말로 인구에 회자되는 명문들이 이 책을 가득 채우고 있다. 학문에 대한 열정, 나라와 세태에 대한 근심, 출세를 위한 지략, 인생의 의미와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는 고전의 가치와 보물 같은 삶의 지혜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시대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좋은 문장의 가치
『고문진보』는 어떤 책인가?
이 책의 제목에 담긴 ‘고문(古文)’이라는 말은 ‘옛날 글’이라는 뜻이며, ‘진보(眞寶)’라는 말은 ‘참된 보배’라는 뜻이다. 따라서 ‘고문진보’라고 하면 ‘옛날 글 가운데서 참된 보물만 모아 둔 책’이라고 우선 풀이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책의 글들은 어떤 기준으로 선별된 것일까? 이 책의 ‘고문’이라는 말에는 본래 옛날 글이라는 뜻도 있지만, 한 걸음 더 들어가면 ‘요즈음 글’이라는 의미의 ‘금문(今文)’에 대한 반대의 뜻이 담겨 있기도 하다. 대개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기 이전에 지어졌던 사서삼경이나 제자백가의 글들 또는 그보다 조금 뒤인 전한(서한) 때 사마천이 지은 『사기』 같은 책에 적힌 글을 고문이라고 하고, 후한(동한) 이후부터 위진 남북조를 거쳐 당나라 초기까지 문단에서 크게 유행했던 변려문을 금문이라고 하였다. 당나라 중기 이후부터 한유, 유종원 같은 이른바 당송 팔대가들이 나타나서, 대구를 많이 사용하고 전고가 많으며 문장에 담는 내용보다는 문장 형식의 꾸밈새에만 치중하는 변려문(금문)을 반대하고, 다시 ‘고문’을 모방하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기 때문에 이들이 쓴 글을 다시 고문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말하자면 이 책에 담긴 ‘고문’은 문장 형식의 아름다움에만 치우치지 않았던 글로서, 문장 안에 인생을 꾸리고 사회를 이끌어가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알맹이 있는 내용, 즉 ‘옛사람들이 생각하던 올바른 도(道)를 담은 글들’이라고 할 수 있다.
옛 문인들의 필독서였던 글의 모범
『고문진보』의 역사적 의의
『고문진보』는 중국에서 원나라 초기에 처음 편집된 이후, 특히 한국과 일본에서 많이 읽혀 왔다. 그러나 이 책이 정확히 언제쯤 중국에서 처음 편집되고 간행되었으며, 후세에 누가 계속하여 이 책을 증보하고 주석을 달았는지, 또 누가 계속하여 그것을 간행하였는지 체계적으로 밝혀진 바는 없다. 다만 흔히 황견(黃堅: 미상)을 이 책의 편자로 보는 견해가 많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후기 또는 조선 초기에 이미 몇 가지 판본이 수입된 이후 널리 보급되었고, 일본에도 한국에서 널리 전파된 것과 똑같은 판본이 들어가기도 했지만, 내용이 조금 다른 판본이 흘러들어 가서 크게 보급되었다고 한다. 조선 초기에는 『고문진보』 목판본과 활자본이 나왔고, 점필재 김종직이 쓴 『고문진보』의 서문이나 퇴계 이황이 쓴 비평 등이 전한다. 퇴계 이황은 “사람들은 시를 공부하기 위하여 『고문진보』를 보통 6백 번씩 읽으면서 암송하는데, 나도 몇 백 번을 읽고 암송하게 되었고, 그 뒤로는 한결 시를 쉽게 지을 수 있었다”고 말하며 이 책의 가치를 증명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현대에 들어와서 일본판 『고문진보』를 바탕으로 번역하고, 심지어 한국에서는 보급되지도 않았던 일본 판본에 대한 해설까지 그대로 옮겨 놓는 현상이 생기기도 했지만, 이러한 현상은 1980~1990년대 여러 학자가 한국의 전통적인 『고문진보』 판본에 의거한 번역을 다시 내어 크게 보급시키면서 점차 사라지고 있다.
수많은 글 중에서 엄선된 시와 산문
『고문진보』의 구성과 내용
이 책은 크게 시를 모은 부분과 산문을 모은 부분으로 양분되는데, 앞의 시 선집을 전집, 뒤의 산문 선집을 후집이라고 부른다. 전집에는 권학문을 비롯하여 오언고풍 단편·오언고풍 장편·칠언고풍 단편·칠언고풍 장편 등의 10여 체 240여 편의 시가, 후집에는 사(辭)·부(賦)·설(說)·해(解)·서(序)·기(記)·잠(箴)·명(銘)·문(文)·송(頌) 등 20여 체 130여 편의 문장이 수록되어 있다.
전집은 시문 선집이기도 하지만 교훈서를 겸하고 있기도 하다. 학문을 권장하는 권학문이나 소식이나 백거이 등의 현실을 풍자한 사회시 등은 시라는 것이 단순히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자연을 읊는 것이 아닌, 현실 속에서 파생된 사회적 산물임을 보여 준다. 따라서 이 책은 단순한 문장 모음집이 아니라 민중과 사회의 제 현상에 대한 중국 옛 성현들의 사유의 편린을 함께 헤아려 볼 수 있는 책이다. 또 전집의 특징적인 부분은 앞서 말했듯이 고체시는 수록하면서 근체시는 배제하고 있다는 점이다. 근체시는 당나라에 들어와서 변려문의 영향을 받아 대구와 전고를 많이 사용하며 음률적인 요소까지도 엄격하게 규정한 율시(여덟 구로 되어 있는 한시) 같은 시이다. 그 이전에 지어지던 형식이 그렇게 까다롭지 않은 시를 고체시 또는 고시라고 하며, 고풍이라고도 부른다. 근체시, 고체시 할 것 없이 오언시와 칠언시가 있지만, 이 책에서는 고체시에 속한 오언시와 칠언시만 수록하고 있다. 그다음에 나오는 장단구, 악부시도 물론 다 고체시다.
후집에는 주로 당송 시대의 고문이 수록되어 있지만, 그 이전에 나온 산문과 운문이 결합된 사부(辭賦)체나, 대표적인 변려문 몇 편도 수록하고 있다. 원래 한자 용어로 ‘산문(散文)’은 직역을 하면 ‘흩어진 글’이 되는데, 이 말은 시구와 같이 문장의 길이(글자 수)가 일정하게 배열되어 있지 않은 글이라는 뜻이다. 즉 긴 문장과 짧은 문장이 자유롭게 혼합되어 있는 글을 말한다. 요즘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산문과는 다른 의미다. 요즘 산문의 개념은 시가와 같이 줄을 자주 바꾸는 형식에 대비되는 것으로서, 문장이 줄줄이 이어지는 ‘줄글’을 말한다. 현대 한국의 문학 용어로는 ‘산문’에 대가 되는 개념이 ‘운문(시가)’이지만, 중국의 전통 문학 용어로서의 ‘산문’에 대가 되는 용어로는 ‘운문’보다는 오히려 변려문을 줄인 ‘변문’이라는 말이 사용된다. 중국에서 원래 산문이라는 말은 문장의 길이가 일정하지도 않고, 대구도 사용하지 않는 글이라는 뜻이다. 말하자면 중국의 옛날 산문은 요즘 우리가 말하는 순수한 산문이 아니라, 매우 시적인 요소가 많이 담긴 산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중국 전통 산문의 한 특징이며 이 책에도 그런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
명실상부한 『고문진보』 번역의 결정판
철저한 고증을 바탕으로 한 전문가의 번역, 해설을 충실히 담은 주석
이 책은 모든 문장에 한글 발음을 달고, 현토를 첨부하였으며, 같은 페이지 안에서 원문과 번역, 주석을 모두 서로 대조하여 볼 수 있도록 하였다. 이러한 책의 체제는 서양에서 한문을 잘 모르는 사람들을 위하여 내는 동양 고전 번역 주석서들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며, 한문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도 이 책을 충분히 음미하며 읽을 수 있도록 고심한 결과이다. 이 책은 이렇듯 전문가들의 철저한 노력으로 완성되었으며, 이런 노력을 바탕으로 『고문진보』에 담긴 글의 정취는 독자들에게 고스란히 전달될 수 있을 것이다.
『고문진보』는 글이라는 것이 무엇이며, 왜 글이 필요한지, 또 글은 어떻게 읽어야 하고, 어떻게 지어야 하는지, 글을 읽고 짓는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만 하는지 등 가장 근본적이고 중요한 문제에 대한 고민을 담고 있는 좋은 글들을 수록하고 있다. 비록 시대가 많이 변하고 문장을 표현하는 도구도 많이 바뀌었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근본적인 고민은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며, 을유문화사판 『고문진보』가 그 고민의 실마리를 풀어 나가는 데 든든한 디딤돌이 되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