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연결 디지털 시대, 우리들의 시간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이제 우리는 24시간 다른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다. 메신저와 이메일, SNS의 새 소식을 전하려 쉴 새 없이 울려 대는 각종 알림음, 확인하지 않은 채 쌓여 가는 푸시 알림 숫자들 속에서 우리는 웹과 앱 사이를 오가느라 바쁘다.
오늘날 우리 일상을 지배하는 실리콘 밸리 회사들의 사업 모델은 대부분 의도적으로 사람들의 주의를 끌어 산만하게 만든다. 그들이 개발한 서비스의 알고리즘은 시선을 빼앗아 주의력을 흩뜨림으로써 인간을 ‘멍하게’ 만든다. 사람들은 웹이나 앱 서비스를 통해 원하는 정보를 더 빨리 얻고 새로운 발견이라도 한 양 심취해 있지만, 그러는 사이 조금씩 우리 곁에서 사라져 가는 것이 있다. 바로 시간, 혹은 시간에 대한 자각이다.
우리는 늘 바쁘다. 바빠서 책을 읽을 시간이 없고, 산책하며 사색을 누릴 시간이 없다. 공들여 손수 만든 물품을 사용하는 일도 없다. 우리에겐 시간이 없다. 완전한 휴식과 사색, 진정한 만족감, 신중함과 정신적 여유 등은 멸종 위기의 동물처럼 자취를 감추는 중이다. 현대 문명 속의 인간은 더 이상 ‘축약할 수 없는 일’에 몰두하지 않는다. 시간을 초월하거나 자연을 대상으로 귀중한 가치를 창조하는 작업은 어리석은 일처럼 여겨진다. 이제, 기다림과 끈기는 성가신 존재일 뿐이다.
세상의 모든 시간 속에서, 느리게 사는 지혜를 찾다
문화사학자로서 예술과 문화에 관한 글을 쓰고 있는 토마스 기르스트는 현대 문화와 동시대 미술에 대해 다양한 글을 써 왔다. 문화사를 꿰뚫는 그의 시선은 마침내 시간을 향해 가 닿았다. “모든 가치 있는 일은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한다”는 밥 딜런의 말처럼, 오래 이어질 만한 가치는 반드시 시간의 빚을 진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세상의 모든 시간’이라는 이 책의 제목처럼 그는 사색과 느림, 혹은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일들의 가치를 찾아 나섰다.
앤디 워홀이 만든 600여 개의 타임캡슐인 ‘TC 시리즈’, 639년 동안 공연되는 존 케이지의 오르간 연주 「ASLSP」, 마르셀 뒤샹이 20년에 걸쳐 비밀스럽게 만든 생애 마지막 작품 〈에탕 도네〉, 수천 페이지로 쓰인 마르셀 프루스트의 걸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저자의 여정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미술과 음악뿐 아니라 수학과 과학, 환경, 식문화 등을 아우르며 느림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세계를 펼쳐 보인다. 작은 시골 우체부가 33년간 돌멩이를 주워 만든 성, 14~19세기의 조리법으로 저녁 식사 코스를 선보이는 요리사, 약 10년에 한 방울씩 떨어지는 역청을 관찰하는 ‘세상에서 가장 느린 과학 실험’, 수백 년간 풀리지 않았던 수학적 난제를 풀기 위해 고심해 온 수학자들까지.
이 책에서 소개하는 특별한 존재들은 말 그대로 ‘시간의 힘’을 보여 준다. 긴 시간을 할애하는 마음, 끈기와 절제를 요하는 오랜 노력을 통해 인류의 역사는 축적되고 계승된다. 시간의 흐름에 파묻히지 않으려면 그 영원의 리듬에 발맞추어 천천히 움직여야 하는 것이다.
미숙함과 나약함을 인정하고, 저마다의 시간을 쌓아 가는 일
그리하여 저자는 온갖 지름길과 속성 코스가 유행하는 이 시대에 감히 둘러가는 길을 권한다. 그는 사람들이 ‘뜻밖의 즐거움’ 또는 ‘행운’을 의미하는 ‘세렌디피티(Serendipity)’에 가까운 우연을 찾아가기를 희망한다. 특히 디지털 시대의 즉각적인 자극과 즉흥적인 즐거움에서 벗어나서 때로는 우연에 몸을 맡겨 보기를 권한다.
그러나 저자의 주장은 단순히 디지털 중독에서 벗어나자는 ‘디지털 디톡스’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또 ‘느림’ 자체가 목표가 되어야 한다는 말도 아니다. 기술의 시대가 주는 혜택을 누리되, 쫓기는 듯한 강박에서 벗어나자는 것이다. 인간이 궁극적으로는 시간 앞에서 무력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역설적으로 그는 더 자유로워진다. 완벽함에 대한 강박이나 일을 빨리 끝내야 한다는 압박으로부터 벗어나기 때문이다.
한번쯤은 온전히 자기 자신에게만 집중하며 스스로의 별을 따라가 보자. 혼자만의 사색을 즐기며 느림과 기다림을 받아들이는 삶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줄까. 긴 침묵 속에서 자신의 내면을 더 멀리까지 둘러볼 때, 우리는 과연 어떤 풍경을 만나게 될까? 기억하자. 이 훌륭한 모험에 필요한 것은 오로지 내면의 고요함과 시간뿐이다.
저자
토마스 기르스트
1971년에 태어났다. 함부르크대학교와 뉴욕대학교에서 미술사와 미국학 및 현대 독일문학을 공부했으며, 「미술, 문학, 일본-미국 간 억류(Art, Literature, and the Japanese American Internment)」라는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2년부터 2003년까지 얀 바그너(Jan Wagner)와 함께 문학지 『요소의 외부(Die Außenseite des Elementes)』를 만들었으며, 하버드대학교의 스티븐 제이 굴드(Stephen Jay Gould)에게 지도를 받으며 예술과학 연구소의 책임자로 일했다. 2003년부터 BMW 그룹의 국제문화 분야를 담당하고 있으며, 뮌헨예술원 명예 교수를 맡고 있다. 최근 『뒤샹 사전(The Duchamp Dictionary)』(2014년)과 『예술계의 100가지 비밀(100 Secrets of the Art World)』(2016년)을 출간했다. 현재 뮌헨에 살고 있다.
역자
이덕임
동아대학교 철학과와 인도 뿌나대학교 인도철학 대학원을 졸업했다. 오스트리아 빈에서 독일어 과정을 수료했으며, 현재 바른 번역 소속 번역가로 일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행복한 나를 만나러 가는 길』, 『선생님이 작아졌어요』, 『비만의 역설』, 『구글의 미래』, 『시간의 탄생』, 『내 감정이 버거운 나에게』, 『어렵지만 가벼운 음악 이야기』, 『엘리트 제국의 몰락』, 『안 아프게 백년을 사는 생체리듬의 비밀』, 『불안사회』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