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악덕과 미덕의 목록을 재작성하고
욕망의 전형을 창조해 낸 사실주의 거장의 걸작
위대하고 무시무시한, 그리고 복합적인 작가 발자크는 문명이라는 괴물과 그 모든 갈등, 야심, 격정들을 보여 준다.―보들레르
발자크 외에는 셰익스피어만이 이만큼 폭넓고 생생한 인류를 창조했다.―에밀 졸라
『사촌 퐁스』는 그의 가장 위대한 업적이다. 그의 눈길이 이보다 더 명확한 적은 없었으며, 인물을 형상화하는 그의 손길이 이보다 더 확고하고 냉정한 적은 없었다.―슈테판 츠바이크
프랑스 사회가 역사가가 되고, 나는 그 서기에 불과하다. 악덕과 미덕의 목록을 작성하고, 정념이 파생시킨 사실들을 모으고, 인물 유형을 묘사하고, 사회의 주된 사건들을 선별하고, 일관된 여러 성격상의 특징들을 결합시켜 전형들을 구성함으로써 많은 역사가가 잊은 역사, 즉 풍속의 역사를 쓰는 일을 해낼 수 있을 것이다.―발자크
『사촌 퐁스』는 발자크가 평생 동안 집필한 200편이 넘는 소설들 중에서 거의 마지막 완성작 가운데 하나로, 국내 초역이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발자크 평전』에서 이 작품을 발자크의 가장 위대한 업적이라고 평하며 “그의 눈길이 이보다 더 명확한 적은 없었으며, 인물을 형상화하는 그의 손길이 이보다 더 확고하고 냉정한 적은 없었다”고 말했다. 만년의 걸작인 이 작품은 사실주의 소설의 전형을 보여 준다. 유행에서 뒤처진 노총각이자 식충 취급을 받는 퐁스의 비극적 일대기는 “신의 섭리를 남용하는” 풍속화가들을 비판하는 저자의 마지막 결말처럼 권선징악형 소설과는 거리가 먼, 지극히 현실적인 한 편의 풍속화 같은 이야기를 보여 준다. 특히 이 소설에는 발자크의 작품 특징인 ‘인물 재등장 수법’이 잘 드러나 있다. 발자크는 자신이 집필한 소설 가운데 90여 편을 묶어 ‘인간극’이라는 제목을 달아 전집으로 다시 구성했다. 이때 한 작품에서 주연급이었던 인물이 다른 작품에서 조연이나 주변 인물로 다시 나오는 식으로 여러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데 이를 ‘인물 재등장 수법’이라 부른다. 『사촌 퐁스』는 하나의 소우주라 불리는 ‘인간극’의 거의 마지막 작품에 해당하는 만큼 인물 재등장 수법이 더욱 도드라진다. 퐁스의 친척인 카뮈조 법원장 부부는 『창녀들의 영광과 비참』에서 마지막에 주인공의 운명을 좌우하는 인물들이고, 퐁스가 일하는 극장의 극장장인 고디사르는 단편 「위대한 고디사르」에서 외무 사원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소설 속에서 그저 가볍게 언급만 되는 인물 중에서도 인간극의 단골들이 몇 명 있다. 명의(名醫) 비앙숑, 소네 상사의 졸작 묘석으로 기념될 뻔했던 장관 드 마르세 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처럼 발자크는 예전 작품에서 온갖 종류의 인간상을 빌려와, 그 이름만으로도 소설 내에 존재감을 부여하고 있다.
특히 이 작품에는 “정념들, 정의, 정치, 커다란 사회 세력들은 사람을 칠 때 그 사람의 상태를 고려하지 않는다”와 같은 인간 사회를 꿰뚫는 통찰이나, “인정받지 못하는 천재보다 더 슬픈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인정받지 못한 위장이다”와 같은 발자크 특유의 재치 있는 문장들이 곳곳에서 빛을 발한다. 입체적이고 생동감 넘치는 인물, 당대 현실을 풍자하고 비판하는 통찰과 위트가 담긴 문장은 왜 발자크가 사실주의 문학의 거장인지를 여실히 보여 준다.
권력과 돈, 두 힘을 좇는 다양한 인간 군상들이
각자의 살길을 모색하며 펼쳐 보이는 생생한 욕망의 풍속화
소설 속 주인공인 퐁스는 노총각에 이미 한물간 음악가로, 골동품 수집과 부유한 집에 식객으로 초대되어 맛있는 음식을 먹는 걸 유일한 낙으로 삼고 살아가는 인물이다. 연애 경험도 전무한 퐁스는 여러모로 자신과 비슷한 친구인 슈뮈크와 함께 살아가는데 두 인물 모두 유아적인 순수함을 지니고 있다. 퐁스는 점점 더 식객으로 초대받지 못하고 외면당하는 신세가 되자 친척인 법원장의 딸 중매에 나서 결혼을 성사시켜 계속 식사 자리에 초대받길 원한다. 하지만 야심차게 추진했던 중매는 실패하게 되고 집안의 명예를 지키려던 법원장 부부로부터 파렴치한 인물이라는 모함을 받고 사회적으로 매장된다. 이때 받은 충격으로 앓아누운 퐁스는 결국 사경을 헤매기에 이르는데, 그가 평생 동안 수집한 골동품과 미술품들이 모두 고가의 가치를 지녔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이를 노리는 인물들이 하나둘씩 그의 주변으로 모여든다.
퐁스가 남긴 걸작 유산을 둘러싸고 여러 인물 군상이 각자의 욕망에 사로잡히는 모습은 한 편의 군상극으로서 손색이 없다. 이 작품 속에는 신의 응징이나 선악의 구분이 없으며, 오직 권력과 돈을 좇는 꼭두각시들만 등장한다. 이는 지극히 현실적인 결말로 이어지는데 이를 통해 발자크는 우리의 현실이 소설과 다름을, 오히려 소설을 통해 보여 주고 있다.
이 작품의 또 다른 특징은 등장인물들의 개성적인 어투에 있다. 시보 부인의 경우 ‘ㄴ’ 발음을 붙이는 버릇이 있고, 정식으로 교육을 받지 못한 탓에 단어의 철자가 틀리기도 한다. 독일인인 슈뮈크 역시 어눌하고 불분명한 발음으로 인해 무슨 뜻인지 한 번에 와 닿지 않는다. 이러한 어투는 등장인물들의 성격을 좀 더 생생하게 드러내 보이면서 현장감을 불어넣는다. 이를 통해 발자크는 전집 ‘인간극’의 서문에 자신이 직접 쓴 “역사가 잊은 역사, 즉 풍속의 역사를 쓰는 일”을 해내고 있다. 『사촌 퐁스』는 이 같은 인간 사회의 방대하면서도 다각적인 면을 보여 주는 발자크의 위대한 작업 결과물이 농축된 작품이다.
저자
오노레 드 발자크
19세기 프랑스 사실주의 문학의 선구자이자 ‘현대 소설의 창시자’로 평가받는 프랑스의 대문호. 1799년 투르에서 자수성가한 부르주아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젊은 어머니는 자식에게 무관심하여, 그는 가정의 사랑을 별로 받지 못하고 자랐다. 발자크는 어린 시절 과도한 독서로 인한 건강 악화로 집에서 1년간 요양한 후 중학교를 거쳐 소르본 법대에 입학했다. 이후 여러 변호사 사무실에서 비서로 일했는데 이때의 경험은 뒷날 그의 소설에 활용되었다. 공증인이 되기를 희망하던 부모의 뜻과 달리 독립하여 파리의 한 다락방에서 글을 쓰기 시작한 발자크는 1819년 집필한 희곡 「크롬웰」을 선보였으나 이를 읽은 콜레주 드 프랑스 교수인 앙드리외로부터 작가의 꿈을 접으라는 충고를 받기도 했다. 10년 뒤인 1829년 발자크는 첫 작품인 『마지막 올빼미당원』을 출간했으며, 20여 년간 초인적인 집필 능력으로 방대한 전집 <인간극(La Comédie Humaine)>을 창조해 나갔다. 제목이 보여 주듯 단테의 『신곡』에 필적하면서 동시에 프랑스와 호적부와 경쟁한다고 호언할 정도로 당대 사회를 총체적으로 보여 주려는 계획이었다. 1850년 발자크는 오랜 연인이었던 한스카 부인과 고대하던 결혼식을 올린 지 두 달 뒤 서거했다. 그의 죽음으로 애초에 의도한 130여 편이 아닌 90여 편의 장편소설로 마감된 <인간극>은 미완에 그쳤으나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거대한 업적으로 남았다.
<인간극>에서 ‘사생활 장면’에 속하는 『결혼 계약』(1835)과 『금치산』(1839)은 풍속 소설가로서 발자크의 강점을 유감없이 느낄 수 있는 작품으로, 국내 초역이다. 발자크 소설의 주요 테마인 돈과 민법을 다루는 두 작품은 가족 간의 돈 문제에 법이 어떻게 개입하는지를 잘 보여 준다. 소송대리인 사무실과 공증인 사무실에서 서기로 일한 바 있는 발자크는 결혼과 지참금, 상속과 유언 등에 관한 계약서 뒤에 숨어 있는 인간의 고통과 절망, 탐욕과 야심을 예리하게 포착해 낸다. 이 두 작품은 무엇보다도 돈의 이해관계로 얽힌 욕망이 꿈틀거리는 세상을 정밀하고 냉혹한 시선으로 분석하는 대문호 발자크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걸작이다.
역자
정예영
서울대학교 불문과와 동대학원 불문과를 졸업했다. 2005년 파리 8대학에서 「발자크의 『인간극』 에서의 이미지의 정신분석」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현재 서울대 불문과 교수이다. 논문으로는 「발자크와 20세기 음악」, 「환상문학을 둘러싼 해석들-모파상의 『오를라』를 중심으로」, 「발자크의 『양피 가죽』에서의 우연과 놀이」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골짜기의 백합』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