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토옙스키 고백록
‘고백’으로 풀어낸 새로운 도스토옙스키 만나기
『작가 일기』의 「고립」, 「동방문제」 등 국내 초역 작품 수록
이 책은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새로운 도스토옙스키를 만날 수 있는, 선물이라 할 수 있다. 기존의 도스토옙스키 작품들이 소설 위주로 소개된 반면, 이 책은 저자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고백’이라는 키워드를 가장 잘 보여 주는 소설과 비평을 아우르고 있다. 또한 작품 앞에 작가 해설을 두어 작품의 이해를 돕고, 작품을 다 읽고 나서는 작품 해설을 통해 그 의미를 좀 더 깊이 있게 파악할 수 있도록 했다.
책에 실린 『지하로부터의 수기』와 『작가 일기』는 모두 도스토옙스키 작품 세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작품들이다. 『지하로부터의 수기』는 도스토옙스키에게 커다란 전환점이 되는 소설로 『죄와 벌』, 『백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비롯한 장편소설에서 나타날 주제를 미리 암시하고 있다. 한마디로 『지하로부터의 수기』는 작가의 대표 장편들로 들어서는 입구에 해당하는 소설로, 도스토옙스키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반드시 읽어 봐야 할 작품이다. 특히 이 작품은 구상 단계에서부터 ‘고백록’으로 불릴 만큼 작가의 고백적 세계관을 잘 보여 준다.
‘고백’이라는 형식은 도스토옙스키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이다. 도스토옙스키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죄와 벌』을 쓸 당시, 작가는 원래 제목을 ‘고백록’으로 하려 했다. 장편 『미성년』을 쓰면서는 “자신을 위해 쓴, 위대한 죄인의 고백록”이라는 메모를 덧붙이기도 했다. 실제로 그의 작품 속 인물들은 고백적 모습을 많이 보이는데, 러시아의 문학 이론가인 미하일 바흐친은 “도스토옙스키의 모든 작품은 하나의 단일한 고백록이다.”라고 평했다. 「한겨레」에는 『지하로부터의 수기』가 오거스틴의 『참회록』이나 루소의 『고백록』에 버금갈 고백록이라는 글이 실리기도 했다.
『지하로부터의 수기』가 도스토옙스키 작품들 중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는 이유는 이런 고백적 성격뿐만 아니라 작가 자신의 모습이 잘 투영된 작품이기 때문이다. 도스토옙스키가 이 작품을 쓸 때 그의 부인이었던 마리야 드미트리예브나는 폐결핵을 심하게 앓는 중이었고, 작가 자신도 병적인 상태로 집필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러한 도스토옙스키의 현실이 이 작품에는 고스란히 묻어 있다.
『지하로부터의 수기』와 함께 실려 있는 『작기 일기』는 도스토옙스키의 사회 비평으로, 작가가 『시민』지 등에서 발표한 글이나 산문 등을 묶은 책이다. 이중에서 편역자는 『도스토옙스키 고백록』 콘셉트에 맞게 작가의 고백적이면서도 역설적인 모습을 잘 보여 주는 글들만을 선별하여 번역했다. 특히 이 중에는 국내 초역인 「고립」, 「동방문제」 등의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어 지금껏 보지 못한 새로운 도스토옙스키의 글을 접할 수 있다.
도스토옙스키의 작품 세계를 여는
열쇠 같은 작품과 사회 비평을 한 권으로 만나다
흔히 소설에 비해 비평은 다소 딱딱하고 어렵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도스토옙스키의 『작가 일기』에 실린 비평들은 그런 편견을 깨는 글들이 많다.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그의 소설보다 더 신랄하면서도 블랙 코미디 같은 유머러스함도 보인다. 「공상과 몽상」에서 도스토옙스키는 당시 러시아의 문제점을 깨닫지 못한 사람들을 가리켜 이들의 좌우명은 “내가 죽고 나서 대홍수가 난들”이라고 비꼰다. 러시아는 무조건 낙후되었다고 생각하며 서구만을 숭상하는 서구주의자들을 묘사하며 악랄한 서구 주인에게 맞으면서도 감동해서 “하느님, 나의 조국에서는 이 주먹마저 얼마나 복고적이고 고결하지 않은지요, 반대로 여기서는 얼마나 고결하고 맛있고 자유주의적인지요!”라고 외칠 거라고 풍자한다.
「역설가」에서는 전쟁이 희생과 헌신이라는 인류의 고귀한 성품을 일깨우므로 인류의 발전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고 주장하는 어느 역설가가 등장한다. 역설가는 평화의 시기에는 사람들이 나태해지며 돈의 노예가 되지만 전쟁이 벌어지면 활기에 차서 돈을 떠나 보다 고귀한 것들, 예를 들어 명예나 조국을 위해 기꺼이 헌신하게 된다는 논리를 펼친다. 이러한 궤변은 도스토옙스키만의 위트를 잘 보여 주는 동시에 그 안에 담긴 물질 만능주의와 자본에 집착하는 현대인의 모습이 신랄하게 풍자되어 있어 씁쓸함도 안겨 준다.
반면 『지하로부터의 수기』는 『작가 일기』에 실린 글들보다 더 무겁고 어둡다. ‘지하인’이라는 문학사에서 중요한 인물을 형상화한 도스토옙스키는 『지하로부터의 수기』에서 끊임없이 과거를 회상하면서 현실을 부정하고, 자신만의 고독한 세계를 구축해 나가는 인물을 등장시킨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죄와 벌』의 라스콜니코프처럼 구원받지도 못했다는 점에서 도스토옙스키의 인물들 중 가장 비극적인 인물로 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