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년 노벨 문학상 후보 · 1965년 레닌상 후보, 1951년 스탈린상 수상
【국내 초역】20세기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트리포노프의 유작!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1981년 노벨 문학상 후보에 거론될 만큼, 20세기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인 유리 트리포노프의 유작 『노인』이 을유세계문학전집 89번째 작품으로 출간되었다. 작가 트리포노프는 혁명, 이념, 역사의 재평가와 같은 무겁고도 본질적인 주제들을 건드리지만, 문제의식을 노골적으로 비판하는 대신 세련된 예술로 승화시켜 독자가 거부감 없이 그것을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힘이 있다. 이 소설은 개인의 일상적 삶을 통해 일상과 이념, 역사와 인간, 정의와 윤리 등의 주제를 깊이 있게 다루면서 인간의 섬세한 심리를 드러내는 미학적 문체가 절정을 이룬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작품이다.
“소설을 읽는 동안 혁명의 역사와 그 진실을 냉정하게 분석하며 자신의 아버지였던 혁명 세대의 신성함에 대한 믿음을 낱낱이 파헤치는 트리포노프의 용기에 놀라게 된다. 그러한 탐구의 결과는 공산당의 공식적인 찬양과는 매우 거리가 멀다(주의 깊은 독자 역시 이러한 결론에 도달할 것이다).”
- V. V. 소키르코(Sokirko), 러시아(소비에트) 평론가
풀리지 않는 역사의 진실, 해결되지 않는 이념의 문제,
동시대적인 삶의 공허함과 반복되는 악과 비윤리성……
개인의 삶을 통해 혁명과 시대 앞에 놓인 인간의 본질을 그린 작품!
『노인(Старик)』은 아직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20세기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유리 트리포노프의 유작이며, 국내 초역이다. 작가 트리포노프는 인간의 삶을 통해 시대의 가치를 잘 표현해 내는데, 『노인』에서는 1919~1921년의 혁명과 내전의 시대를 자세하게 그리고 있다.
주인공 ‘파벨 예브그라포비치’는 1919년 볼셰비키 혁명과 내전에 참전한 용사로서 주변 사람들에겐 혁명의 전설로 통하지만, 1970년대의 현실에서는 무력한 노인일 뿐이다. 이야기는 어느 날 옛 친구이자 첫사랑 ‘아샤’로부터 날아든 편지 한 통에서 시작된다. 그녀가 오래된 잡지에서 우연히 ‘미굴린’이라는 혁명가에 대해 쓴 파벨의 기사를 발견하고, 수소문하여 그에게 편지를 보낸 것이다. 수년 전 아내 ‘갈랴’를 잃은 뒤 자식들과 함께 공동 주택에서 살고 있지만 자식들과 소통하지 못하고 고독한 나날을 보내던 파벨. 그에게 55년 만에 듣는 아샤의 소식은 역사적 진실 앞으로 그를 데려간다.
파벨은 미굴린을 재조명하는 기사를 쓴 사람이 자신이라는 사실에 놀라워하는 아샤에게서 미묘한 부당함을 느끼고, 진실을 찾기 위해 과거의 기억을 끌어 올린다. 여기서 노인(파벨)의 기억은 사건의 추이를 따르지 않고 그가 살아가는 현실과 교차하며 두서없이 조각조각 떠오른다. 기억의 퍼즐이 그려 내는 과거에는 자신과 아샤를 포함하여 혁명과 내전의 시대를 겪었던 수많은 사람과 혁명가의 삶이 있다. 특히, 혁명 붉은 근위대의 지휘관이자 혁명의 열렬한 지지자였으나 반역자로 재판정에 오른 ‘미굴린’에 얽힌 기억은 역사적 진실의 회복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역사와 이념과 인간의 실존에 대해 깊이 있게 탐구한 소설
『노인』은 역사의 거대한 흐름이 지시할 수 없는 온갖 작은 일들로 인한 우연이야말로 삶의 실존적 본질이라고 말한다. 역사의 물결 속에는 개별적이고 주관적인 수많은 개인의 삶이 얽혀 있고, 그것이 함께 뒤섞여 시대를 특정한 방향으로 이끌어 간다. 그러나 혁명이 일어난 1919년의 페테르부르크 거리에서 벌어진 대혼란은 사람들의 물결이 만들어 내는 역사와 사건을 표현하지만, 그 속에 휩쓸린 개인의 삶은 그러한 흐름으로는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개별성과 고유성을 갖는다. 작가는 이 점에 주목하여 감정과 생각이 빠진 사건의 건조한 기록 속에는 역사적 진실의 실체가 존재하기 어렵다는 것을 보여 준다. 또한 이념의 문제 역시 인간 실존의 관점에서 바라본다. 작가는 흑백 논리에 빠지곤 하는 이념적 판단은 순수한 추상이나 논리로써만 가능할 뿐이고 실제 인간의 삶과 사고 속에서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이처럼 『노인』은 서술자 ‘파벨’과 그를 둘러싼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역사의 진실이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고민하면서 동시에 역사와 이념, 혁명과 시대 앞에 놓인 인간의 본질에 대한 깨달음을 추구한다.
제대로 소통하지 못하는 부모와 자식 세대를 통해
두 시대가 교차하는 1970년대 소비에트 사회를 보여 주다!
소설에는 혁명과 내전 외에 1970년대 소비에트의 삶도 그려진다. 즉, 제대로 소통하지 못하는 부모와 자식 세대를 통해 두 시대가 교차하는 모습을 담는다. 파벨은 자식들과 대화하지 못하고, 사별한 아내의 친구인 폴리나는 자식들에게 짐이 될까 노심초사하며 노년의 고통을 힘겹게 견딘다. 여기에 폴리나는 혁명 전사의 집으로 불리지만 실상은 양로원이나 다름없는 곳으로 떠날 결심을 하는 데 반해, 파벨은 창문 너머로 들리는 손자의 말소리에서 인생 유전을 느끼며 자식들과 함께 살아갈 삶을 더욱더 소망한다.
이러한 불화는 노인의 관점에서 자식 세대의 탓이지만, 두 노인은 우연히 자식들 역시 그들만의 문제로 고통스러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즉, 아들 루슬란의 퇴직 소식이나 남편의 발병으로 고통스러워하는 폴리나의 딸 지나의 삶을 통해 짧게나마 자식 세대를 이해하고 공감하기도 한다.
모두가 함께 잘사는 세계를 만들기 위해 혁명에 뛰어들었지만 자식들은 여전히 가난에 힘겨워하며 노인 파벨을 원망한다. 혁명이 만든 새로운 세계는 분명 과거와 다른 세계지만, 여전히 고통과 가난은 없어지지 않았고 새로운 불평등과 부정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풀리지 않는 역사의 진실, 해결되지 않은 인간 실존의 문제, 동시대적인 삶의 공허함과 반복되는 악과 비윤리성 앞에 노인 파벨이 느끼는 감정은 역사적 아픔을 겪은 한국 독자들도 공감할 수 있는 감정이자 고민해 볼 만한 주제일 것이다.
1951년 스탈린상 수상, 1965년 레닌상 후보, 1981년 노벨 문학상 후보
유리 트리포노프는 소비에트 체제에 순응한 작가인가, 저항한 작가인가?
유리 트리포노프는 생전에 단 한 번도 소비에트 사회에 정면으로 맞서거나, 은폐된 진실을 폭로하거나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1951년 스탈린상을 받았던 『대학생들』이나 1965년 레닌상 후보에 올랐던 『갈증의 해소』와 같이 그의 작품은 소비에트의 체제에 적극적으로 수용되었다. 또한 흔히 스탈린의 공포 정치 시기에 저항적이고 양심적인 작가들이 선택했던 자가 출판이나 지하 출판을 하는 것과 달리, 그는 소비에트의 문학잡지의 지면이나 국가가 공식적으로 지원하는 출판사에서 책을 냈다. 이 때문에 트리포노프를 소비에트 사회의 체제에 순응한 작가로 보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에 대한 의문이 계속 제기되어 왔다.
그러나 트리포노프를 체제 순응적 작가와 저항적 작가라는 흑백 논리 속에 가두는 것은 『노인』의 주인공인 ‘파벨’이 이야기했던 것처럼 인간의 실존적 본질을 외면한 처사일 것이다. 물론 또 다른 주인공인 ‘미굴린’ 같은 혁명과 내전의 전설을 실제 아버지로 둔 트리포노프가 혁명의 이상이 낳은 소비에트 사회를 부정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그러한 소비에트 사회를 이상적 사회로 칭송했다고 보기도 힘들다. 그는 소비에트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 속에서 실존적이고 윤리적인 문제를 끊임없이 제기했을 뿐 아니라, 『노인』에서 드러나듯 혁명이나 역사의 재평가와 같은 무겁고도 본질적인 주제들을 제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소비에트 체제속의 작가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은 그러한 문제의식을 노골적으로 비판하는 대신 세련된 예술로 승화해 냈기 때문일 것이다. 『노인』을 번역한 서선정 교수는 그것이야말로 그가 이념이나 체제적인 테두리를 벗어나 진실을 추구한 방식이며, 독자들에게 수용된 이유라고 설명한다.
본문 속으로
아무것도 아닌 작은 일이, 마치 화살이 조금만 휘어져도 그렇듯, 하나의 길에서 다른 길로 이동하는 원동력을 만든다. 그리하여 당신은 로스토프가 아닌 바르샤바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나는 강력한 시대에 흠뻑 빠진 소년이었다. 아니, 다른 노인들처럼 거짓말하고 싶지는 않다. 길을 알려 준 것은 시대의 흐름 —그 안에 있는 것이 기뻤다 —과 우연, 직감이지, 엄준한 수학적 의지가 아니다. 거짓말을 하게 두지 마라! 사람마다 달랐을 수 있다. 이런, 그럼 내가 무엇 때문에 논쟁하는 거지? 아마 다른 노인들은 상황이 달랐겠지. 누구도 모욕해서는 안 된다. 나는 고독하고 꿈이 많은, 거리의 삶을 살고 있으며 정신이 나갈 정도로 사랑에 빠진 소년이었다……. - 72~73쪽
그에게 사람들이란 노련한 화학자처럼 그가 한순간에 구성 성분들로 분리시킬 수 있는 화학적 화합물 같다. 이쪽 절반은 마르크스주의자, 4분의 1은 신칸트주의자, 그리고 4분의 1은 경험 비판주의자. 어떤 볼셰비키 당원은 겉으로 보기에 겨우 10퍼센트만 그렇고, 속은 멘셰비키다. - 97쪽
잔혹한 해, 잔혹한 시간이 러시아 위에 드리워지고 있다. 잔혹한 시간은 모든 것을 잠식하고 불길 속에 파묻으며 화산의 용암처럼 흐르고 있다……. 그리고 이 불길의 품속에서 새롭고 유례없는 무언가가 탄생하고 있다.
흐르는 용암 속에서는 뜨거움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니 그 안에 있으면서 어떻게 시대를 관조할 수 있겠는가? 여러 해가, 온 생애가 흐른 다음에야 이해되기 시작하는 법이다. 어떻게, 무엇이, 왜 그러했는지를 말이다. 이 모든 것을 멀리서, 다른 시대의 정신과 눈으로 바라보고 이해한 자는 드물다. - 123~124쪽
진실을 공유하지 않은 죄가 있음을. 스스로를 위해 물었었지. 그러나 진실은, 내 생각에, 친애하는 의학 박사님, 오로지 모두를 위한 것일 때만, 오로지 그때만 진정한 보석이라오. 샤일록의 황금처럼, 오직 한 사람의 베개 아래에만 감춰져 있을 때는 퉤, 침 뱉을 가치도 없다오. 이것이 노년에 내가 고통스러워하는 이유요, 왜냐하면 시간이 남지 않았으니까. 당신들이 뭐든 이해했는지 모르겠소만, 아마도 아니겠지요. “그렇지요, 그렇지요”라고 동의를 표했지만, 집중하며 미소를 띠는 시선에는 안경 너머로 여전히 똑같은 냉기가 보인다. 아마도, 노인이 헛소리를 하고 있으니 자신의 염려가 옳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고 결론을 내렸겠지. 불명확한 죄의식으로 인한 조울증적 정신 이상에 홀아비의 우울이 복합된 것이라고. 불쌍한 아이들! 나는 그들에게 연민을 느낄 뿐만 아니라, 공포와 놀라움, 그들이 별장 사람인 척하는 이 똘똘이들에게 달려갔다는 사실을 높이 평가한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들은 여전히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 342~343쪽
저자
유리 트리포노프
1925년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유명한 혁명가였던 아버지와 기술 경제전문가이자 아동 문학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유복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스탈린 대공포 시대에 아버지는 처형당하고, 같은 해인 1938년 어머니마저 8년 형을 선고받고 투옥되어, 외할머니의 손에 자란다. 1942년 대학에 진학하려 하지만, ‘조국의 반역자’의 아들로 낙인찍혀 뜻을 이루지 못한다. 결국 비행기 공장에서 일하면서 그곳에서 발행하는 신문을 편집하며 때를 기다리다가, 1944년 고리키 문학 연구소에 입학한다. 그는 원래 시 창작에 뜻을 두었으나, 당시 고리키 문학 연구소 입학 위원장이었던 콘스탄틴 페딘이 그가 제출한 산문에 호평하자 방향을 바꾼다. 1948년 신문 「모스콥스키 콤소몰레츠」에 단편소설 「익숙한 장소들(Знакомые места)」과 「초원에서(В степи)」를 게재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다. 1950년 고리키 문학 연구소 졸업 작품인 『대학생들(Студенты)』이 페딘의 추천으로 잡지 『노브이 미르』에 실린다. 전형적인 사회주의 리얼리즘적 문학을 구현한 이 작품은 그에게 1951년 스탈린상과 대중적 인기를 안겨 준다. 그러나 이후 그는 수년간 정체기에 빠져 있다가 1953년 스탈린 사망 후 사회 변혁을 몸소 체험한다. 1955년 아버지가 복권되고, 1957년 소비에트 작가 동맹에 가입한다. 1963년 잡지 『즈나먀』에 투르크메니스탄 운하 건설을 다룬 장편소설 『갈증의 해소(Утоление жажды)』를 연재하고, 1965년 레닌상 후보에 오른다. 1965년 아버지가 남긴 서류를 바탕으로 혁명기의 실존 인물을 다룬 다큐멘터리 중편소설 「모닥불 빛(Отблеск костра)」을 발표하는데, 이때부터 인물의 세밀한 심리에 천착하면서 역사와 인간의 관계를 주된 주제로 내세운다. 1978년 잡지 『드루쥐바 나로도프』에 『노인(Старик)』을 발표하고, 이후 독일 소설가 하인리히 뵐의 추천으로 노벨 문학상 후보로도 거론된다. 그러나 1981년 3월 갑자기 신장암으로 입원, 그해 3월 28일 치료를 받는 중에 폐혈전 색전증으로 사망한다.
그가 남긴 작품으로는 장편소설로 『불안(Нетерпение)』, 『시간과 공간(Времяи место)』 등이 있고, 중편소설로 「교환(Обмен)」, 「예비 결산(Предварительные итоги)」, 「긴 이별(Долгое прощание)」, 「또 다른 삶(Другая жизнь)」, 「강변의 집(Дом на набережной)」 등이 있다. 단편소설로 「어느 여름 정오였다(Был летний полдень)」, 「베라와 조이카(Вера иЗойка)」, 「버섯 따는 가을에(В грубнуюосень)」, 「승리자(Победитель)」 등을 발표했고, 그 밖에 연작 소설 「전복된 집(Опрокинутый дом)」과 미완성 장편소설 『소멸(Исчезновение)』이 있다.
역자
서선정
서울대학교 노어노문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러시아 학술원 러시아문학 연구소에서 12세기 러시아 문학전통과 작가 키릴 투롭스키의 창작 간의 상호관계에 대한 문헌학적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학교, 상명대학교, 성균관대학교에 출강하고 있으며, 주요 논문으로 「중세러시아 예술론 고찰: 언어와 도상 텍스트를 중심으로」, 「민중의 문학에서 허위 민속으로: 비평 속에 드러난 소비에트 구술문학과 이데올로기」, 「고대 러시아 문학의 공간 표상과 여행자」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