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꾸밈없는 사람,
세상의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웠던 작가,
멋과 자유가 넘쳤던 중년의 사노 요코를 만나다
『아니라고 말하는 게 뭐가 어때서』는 까칠하지만 솔직하고 진심 어린 표현이 돋보이는 40대 사노 요코의 산문집이다. 한없이 가볍고 발랄한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사노 요코의 내면을 깊이 있게 들여다볼 수 있는 이 책은 아직 나이가 차지 않은 저자의 젊은 시절의 고뇌가 곳곳에 묻어난다. 세상을 달관한 듯한 노년의 사노 요코 글과는 다른 색의 연륜을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이 책은 더 힘이 넘쳐나고 맹랑하면서도 여전히 시크하다.
사노 요코는 오로지 작가 자신이 겪은 경험들을 통해 독자적인 생각을 관철시킨다. “저축 따위보다 친구가 중요하고, 이혼이 기뻐서 어쩔 수가 없고, 내가 싼 똥에 질식해서 죽더라도 미친 듯이 자고 싶고, 상대를 예술적으로 험담하는 지성을 기르고 싶고, 내가 뱉은 욕이 너무 심해서 후회할 때도 있으며, 죽을 때까지 돈을 벌고 싶다”고 말한다. 그런 세상 풍파에 시달리지 않는 꼿꼿한 그녀의 뚝심이 이 책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큰 줄기다. 또한 사노 요코는 절대로 일반적인 상식, 보편적인 지식에 빗대어 자신의 이야기를 표현하지 않는다.
나는 다른 사람의 어머니에게든 내 어머니에게든 ‘내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은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얄미운 아이였음에 틀림없다. _p182
문제는 좋고 싫음이 분명한 그녀가 자신과 비슷한 자아를 가진 아들 녀석을 낳았다는 것. 그런데 사노 요코는 그 사실에 섬뜩해한다. 모순 덩어리다. 이와 비슷한 모순은 책의 곳곳에 드러난다. 막 배 속에서 나온 아들을 바라보며 그 아이의 80세 고독이 떠올라 울었다는 그녀가 멜론 하나를 주기 싫어 사춘기 아들 몰래 친구와 나눠 먹는 장면은 모순을 넘어 커다란 웃음마저 선사한다. 또 자신이 키우는 숏다리 시바견이 못생겨서 사람들의 놀림을 받는 것에 상처를 받으면서도 다리가 긴 예쁜 강아지를 보면서 “못생겼어, 개답지 않아!”라고 하는 모습은 우리가 가진 시각의 모순을 여실히 보여 주는 대목이다.
이런 모순들은 가까이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는 가운데 일어난 불공평한 편애다. 사노 요코는 당당히 말한다. “이런 부조화 가득한 인생, 내 안에 가득한 모순 덩어리들… 그래서 뭐 어떻다고? 백조가 아니라 오리로 태어났으면 오리로 훌륭하게 살아가면 되지!” 탁월한 위트로 그것들은 그것대로 의미가 있고 살아가는 힘이 되는 것임을 피력한다. 파워풀하고 거침없으며 인간미 철철 흐르는 사노 아줌마의 자유분방한 수다에 빠져 키득키득 웃고 있다 보면 어느샌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세상살이에 공감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지금 내 주변에 있는 것이 ‘제일 좋은 것’이라는 사실에 안도하고, 편견은 그냥 ‘편견’이라는 그녀의 단순한 논리에 정해진 틀 안에 갇혀 있던 자신을 깨는 순간을 맞이할 수 있다. 그래서 남의 눈치 보지 않고 비위 맞추지 않으며 사는 그녀는 정해진 틀에 맞춰 살라는 이 세상 사람들에게 당당하게 외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삶이 별 다를 것 없다고 말하는 이 글을 읽고 왠지 모르게 힘이 나서 작가처럼 솔직하고 씩씩하게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그건 솔직하고 거침없는 그녀의 이야기 속에 삶과 인간에 대한 애정이 들어 있어서가 아닐까? _ 옮긴이의 말
허를 찌르는 직설 화법!
유쾌한 독설 작가가 건네는 격려와 위로
펼치는 페이지마다 주옥같은 명언들을 쏟아내는 사노 요코는 특유의 경쾌하고 꾸밈없는 화법으로 독자들을 사로잡는다. 머리말 대신 자문자답으로 시작하는 이 책은 “나 이런 사람이야. 어때, 내 얘기 더 들어 볼래?” 하고 작정하고 말하는 사람처럼 책을 펼치자마자 흡입력 있는 글로 서서히 몰입시킨다.
이번 책에는 유독 작가와 가까운 사람들의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이는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그녀의 성격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준 순간들이기 때문일 테다. 어린 시절 유난히 사이가 좋았던 오빠와의 추억들과 받아들일 수 없었던 그의 죽음, 언제든 찾아가면 만날 수 있었던 소꿉친구의 갑작스러운 부고, 노망이 나서 어린아이가 되어 버린 큰어머니의 이야기 등 과거를 회고하며 번뇌하고 갈등하지만 결코 슬프거나 우울하지 않다. 가슴 먹먹한 이야기를 담담하게 말하는 그녀 덕분에 오히려 독자들은 그녀에게 격려와 위로를 받고 힘을 낼 수 있다. “이 세상은 추악하고 엉망진창이고 빌어먹게 지긋지긋하지만, 한없이 부드럽고 아름답고 엄숙하고 넙죽 엎드리고 싶을 만큼 멋지다”라는 그녀의 말은 마치 작가 자신의 모습을 그리는 듯하다. 그런 그녀의 글을 읽다 보면 사노 요코는 참으로 청백하게 느껴진다. 기분이 좋다. 그녀가 말하는 삶처럼 살고 죽는 것은 나쁘지 않은 일이다.
어른이 되고 나서 제일 기뻤던 일은 이혼했을 때예요. 엄청난 고독을 맛보게 되리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마저도 기뻐서 견딜 수가 없었어요. 아침 햇살에 빛나는 빨래를 보고 있으니 아아, 살아 있다는 건 멋지구나, 해님이 있다는 게 이렇게 감사할 일이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서 눈물이 나올 정도로 감사했어요. ---p8
학창 시절부터 친하게 지낸 친구가 병에 걸렸다. 불안에 떨거나 울거나 발끈하는 나를 “괜찮아, 괜찮대도.” 하고 그녀가 위로해 주면, 나는 정말로 괜찮은 기분이 들었다. 괜찮다, 그렇게 오오츠카 경찰서 옆길에서 쭉 올라가다가 왼쪽으로 돌면 나오는 골목 안에서 그런 말을 듣는 것을 지극히 당연한 일로 여겼던 나는 병원으로 가는 차 안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수도꼭지를 틀면 물이 나올 거라 생각했는데 단수가 되어 평정심을 잃은 사람처럼 말이다.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나는 깨달았다. 아아, 우리는 전우와 같았구나, 그것도 25년 넘게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일상과 싸워 온. 내 눈물은 그 증표였다. ---p32
멜론을 여섯 개씩이나 받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이 세상의 모든 순위는 멜론으로 매길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입원해서 멜론 한 상자를 받았을 때 ‘아아, 마침내 나도 병문안으로 멜론을 받을 수 있는 수준이 되었구나, 오랜 여정이었다’ 하고 혼자 감상에 젖었다. 나는 아들 모르게 멜론 한 개를 여러 번에 걸쳐 가늘게 잘라 먹었다. 의식적으로 숨기고 먹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아들이 없을 때만 먹었다. 집 안에 나밖에 없는데도 몰래 먹었다. 여동생이 집에 놀러 왔을 때도 역시 남은 멜론을 몰래 먹었다. ---p89~91
본문 판권 저작권 표기를 아래와 같이 정정합니다.
일러스트ⓒ사노 요코 → 일러스트 사노 요코
저자
사노 요코
1938년 중국 베이징에서 태어났다. 전쟁이 끝나고 일본으로 돌아와 일본 무사시노 미술대학 디자인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베를린 조형대학에서 석판화를 공부했다. 독특한 발상을 토대로 깊은 심리를 잘 묘사하고, 유머 가득한 그림과 리듬 있는 글이 조화를 이루는 작품을 많이 발표했다. 작품으로는 그림책 『100만 번 산 고양이』, 『아저씨 우산』, 『아빠가 좋아』 등이 있다.
『아저씨 우산』으로 산케이 아동출판문학상 추천을 받고, 『내 모자』로 고단샤 출판문화상 그림책 부문을 수상했다. 2010년 11월, 7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우리나라에는 그녀가 사망 전에 쓴 두 권의 에세이 『사는 게 뭐라고』와 『죽는 게 뭐라고』 외 한창 활발히 활동할 당시 쓴 『열심히 하지 않습니다』 등이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역자
전경아
중앙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요코하마 외국어학원 일본어학과를 수료했다. 현재 번역 에이전시 엔터스코리아 출판 기획 및 일본어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역서로는 『미움받을 용기』(1, 2), 『마음에 구멍이 뚫릴 때』, 『이 얘기 계속해도 될까요?』, 『유리멘탈을 위한 심리책』, 『마흔에게』, 『지속가능형 인간』, 『역사 문화 인문지식이 업그레이드되는 유쾌한 성경책』, 『지도로 보는 세계민족의 역사』, 『굿바이, 나른함』, 『간단 명쾌한 발달심리학』, 『비기너 심리학』, 『새콤달콤 심리학』, 『세계장편문학』, 『미스터리 세계사』,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등 다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