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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유세계문학전집_88

페테르부르크에서 모스크바로의 여행

Puteshestvie iz Peterburga v Moskvu

알렉산드르 라디셰프 ,서광진

332쪽, 128*188, 13,000원

2017년 03월 30일

ISBN. 978-89-324-0470-7

이 도서의 판매처

움직이지 않던 거대한 편견과 억압을 움직이게 하는

최초의 선언 같은 사회 소설

 

라디셰프는 명실상부 혁명의 예언자이자 선구자란 평가를 받으며 러시아적 저항 정신의 첫 자리에 놓이는 인물이다. 1918730일에 개최된 소비에트 인민위원회는 레닌의 주도 아래 사회주의와 혁명의 위대한 활동가들및 작가, 시인들의 동상 제작을 의결했는데, 그 첫 번째 결과물이 바로 라디셰프 동상이었다.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라디셰프 자신은 혁명가라기보다는 개혁가에 더 가까운 인물이다. 라디셰프는 유형 기간을 제외하면 평생 공직에서 법률 업무를 담당하면서 사회 개조와 개혁에 힘을 쏟았다. 그는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것을 목표로 언제나 농노제와 전제정을 개혁하려 했다. 그럼에도 라디셰프가 혁명가가 아닌 개혁가로 평가받는 이유는 그가 전제정 자체를 타파의 대상보다는 개혁의 대상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라디셰프에게 좋은 정치 체제란 좋은 전제정을 의미했다. 이 책의 스파스카야 폴레스치장을 보면 이러한 작가의 생각이 잘 담겨 있다. 스파스카야 폴레스치에서 모스크바로 향하던 주인공은 마차에서 꿈을 꾸게 된다. 이 꿈에서 주인공은 황제가 되어 자신에게 찬사를 바치는 신하들에 둘러싸여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다. 꿈속에서 주인공은 자신을 공명정대하고 자비로운 황제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느 순례자는 스스로 진리이자 안과의사임을 자처하며 진실을 제대로 보지 못했던 황제의 눈을 뜨게 해 준다. , 황제를 계몽시켜 훌륭한 통치자로 거듭나도록 하는 것이다. 이처럼 황제 자체를 부정하지 않았다는 측면에서 라디셰프의 보수적인 면모가 드러난다.

그럼에도 라디셰프는 당대에는 받아들이기 힘들 정도로 개혁적인 인물이었다. 이러한 그의 모습은 소설 곳곳에서 잘 드러난다. 주인공인 는 모스크바까지 가는 길에 여러 도시와 역참을 거치면서 다양한 계급의 다채로운 사람들을 만나며 러시아의 본모습을 깨달아 간다. 라디셰프는 그들 중에 안하무인격의 관리와 귀족 가문의 족보를 정리하는 일에 거의 모든 것을 바친 인사 관리국 서기 등을 등장시켜 당시의 기득권층을 풍자하고 있다. 아울러 농노제를 타파하고 귀족들의 특권을 내려놓아야 한다고 역설하기도 한다. 이러한 개혁적인 성향과 풍자로 인해 이 작품이 처음 출판되었을 때 예카테리나 2세는 반란을 일으켰던 푸가초프보다 더 나쁜 인물로 라디셰프를 거론하며 격분했다. 그 결과 라디셰프는 사형까지 언도받았지만 나중에 감형을 받아 시베리아로 유형을 떠나게 된다. 기득권에 반대하는 진영에서도 이 작품이 끼친 영향은 컸으며, 19세기의 위대한 망명 지식인이었던 게르첸은 이 작품을 두고 거대한 고발장이라 정의하기도 했다. 그만큼 이 작품은 문학의 사회적 역할을 제시했다는 의미를 가짐과 동시에, 근대 러시아 소설이 태어나던 자리를 잘 보여 주고 있다.

 

 백 개의 아가리를 가진 괴물들이 판치는

제정 러시아 사회를 고발하는 거대한 고발장

 

라디셰프는 어느 하나의 문학사적, 예술사적, 철학사적 경향으로 포착하기에는 쉽지 않은 작가다. 라디셰프를 정의하는 수많은 용어 가운데에는 서로 양립이 불가능한 것들도 있다. 문학사조상으로 라디셰프는 리얼리스트이면서 감상주의자이기도 하고, 사회 계급적 견지에서는 귀족 혁명가이면서 동시에 민주주의자고 자유주의자로 정의되기도 한다. 이처럼 다양한 평가를 받는 라디셰프지만 당대의 부조리와 모순을 고발했다는 사실만은 이견이 없다. 특히 라디셰프는 농노제를 강하게 비판한다. 호틸로프장에서 라디셰프는 토지에 대한 농민들의 권리가 박탈되어 있던 당대의 상황을 자연법에 의거해 비판한다. 원시 사회에서는 땅을 경작하는 사람이 땅을 소유할 권리를 가졌지만, 이제는 땅을 경작하면서도 자신의 생계를 대부분 다른 이에게 의존하는 모습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라디셰프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연으로부터 자연과 동일한 본질을 부여받았고, 따라서 인간은 모두 동등하다는 사상을 천명하기도 한다. 이처럼 라디셰프는 18세기의 사람이면서도 오늘날의 시민 의식과 견주어도 전혀 손색이 없을 만큼 개혁적이고 급진적인 사고를 가졌던 인물이다.

특히 라디셰프는 일반 서민들이 귀족들보다 훨씬 고귀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 작품에서 역참이나 여러 도시에서 만나는 서민들은 관리나 귀족들에 비해 훨씬 순수하면서도 고결한 마음을 가진 것으로 묘사된다. 에드로보에서 만난 농민은 주인공이 선의의 뜻에서 결혼 지참금으로 쓰라고 건넨 상당한 액수의 돈을 거부한다. 농민은 자신에게 두 손이 있고 그 손으로 스스로 돈을 벌 수 있기에 기부금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클린에서 만난, 노래를 하며 구걸을 하는 어느 눈먼 노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노인은 주인공이 내민 1루블을 자신이 지금껏 받아 온 금액이나 음식보다 큰 액수고 자신이 그만한 돈을 쓸 수도 없다는 이유로 거절한다. 노인은 대신 자신에게 기부하고 싶다면 목을 따뜻하게 해 줄 목도리를 선물해 달라고 요청한다. 이처럼 페테르부르크에서 모스크바로의 여행에 등장하는 서민들은 모두 건강한 노동을 하고, 노동의 대가만큼을 받아가는 선한 존재들이다. 반면 역참에서 수많은 말을 내오라고 거드름을 피우는 관리나 귀족들은 노동을 하지도 않고, 다른 사람들 위에서 착취하기만 하는 사회의 불필요한 존재들로 그려진다. 이들이 틸레마히다에서 작가가 인용한 살찌고 더러우며 거대한, 백 개의 아가리를 가진 괴물들인 셈이다. 라디셰프는 이런 괴물들을 없애야만 비로소 인간은 인간답게, 자연법적인 세상 속에서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노라고 말한다. 이러한 혁명적 시각은 계층 간의 차이가 갈수록 벌어지고 민주주의적 사고가 위협을 받는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본문 중(책 속으로)

 

우리 어머니는 러시아 옛날이야기의 해설자였다고. 꾀꼬리 강도는 자신의 뛰어난 웅변술 때문에 꾀꼬리로 불렸다는 것을 알게 될 걸세. 내 이야기에 끼어들지 마. 어쨌든 옛날 옛날 어느 곳에 황제의 총독이 살았어. 젊었을 때 낯선 땅을 돌아다니다 굴 먹는 법을 배운 이후 애호가가 되었지. 그때까지는 돈이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식탐을 꾹 참았다가 페테르부르크에 들를 때면 열 개씩 먹곤 했다네. 그가 재빨리 승진한 만큼 식탁 위의 굴도 점차 늘어 갔지. 그러다 총독이 되어, 자신의 돈은 물론이고, 자신이 처리할 수 있는 국고도 많아지자 임신한 여편네처럼 굴을 대하게 되고 말았어. 굴 먹을 생각에 잠도 자고 눈도 떴단 말이지. 굴이 제철일 때는 누구도 한가하지 못했어. - 본문 35~36

 

멈춰 보세요.” 자기 자리에서 순례자가 내게 말했다. “멈추시고 제게 오십시오. 저는 당신과 당신 같은 사람에게 보내진 의사입니다. 당신의 시력을 깨끗이 만들어 드립니다.” 그리고 외쳤다. “, 백내장이라니!” 내 주위의 사람들이 나를 방해하고 실력으로 저지도 해 보았지만, 나는 어떤 보이지 않는 힘에 끌려 그녀에게 가고 있었다. 순례자가 말했다. “두 눈 모두 백내장이 있습니다. 그래서 당신께서는 모든 것에 대해 그토록 단호하게 판단하였습니다.” 이런 말을 한 다음 그녀는 나의 두 눈을 건드렸고, 두꺼운 막을 떼어 냈다. 그것은 각막 같았다. 그녀가 내게 말했다. “이제 보이실 겁니다. 당신은 장님, 그것도 완전한 장님이었습니다. 저는 진리입니다. 당신의 지배를 받는 백성들의 탄식에 동정심을 느껴 신께서 저를 천상계에서 아래로 내려보냈습니다.” - 본문 50~51

 

이 도시에 자리 잡고 있는 발다이 호수에는 자신의 애인을 위해 목숨을 희생했던 수도사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도시에서 1.5베르스타 떨어진 호수 한가운데의 섬에는 니콘 총대주교가 세운 이베론 수도원이 있다. 이 수도원의 한 수도사가 발다이에 다녀와서 그곳 주민의 딸과 사랑에 빠졌다. 그들의 사랑은 곧 상호적인 것이 되었고, 그 끝을 보고자 했다. 그 쾌락에 한번 발을 들이자, 어떤 힘으로도 막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들의 상황 때문에 한계가 있었다. 사랑에 빠진 남자는 수도원에서 자주 나올 수 없었고, 사랑에 빠진 여인 역시 남자의 수도원에 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의 열정은 모든 것을 극복했다. 사랑에 빠진 수도사는 두려움을 모르는 사내가 되었고, 그는 거의 초자연적인 힘을 얻게 되었다. 이 새로운 레안드로스는 애인의 품에 안겨 달콤한 쾌락을 즐기기 위해, 거의 매일 밤 검은 망토를 두르고 아무도 보이지 않게 조용히 자신의 거처를 나와 수사복을 벗어 던지고 반대편 해안으로 호수를 가로질러 헤엄쳐 넘어갔다. - 본문 134~135

출발
소피아
토스나
류바니
추도보
스파스카야 폴레스치
포드베레졔
노브고로드
브론니치
자이초보
크레스티치
야젤비치
발다이
에드로보
호틸로프
비시니 볼로초크
비드로푸스크
토르조크
메드노예
트베리
고로드냐
자비도보
클린
페시키
초르나야 그랴즈
로모노소프에 대하여


해설 - 18세기 러시아에 대한 ‘거대한 고발장’
판본 소개
A. N. 라디셰프 연보

저자

알렉산드르 라디셰프

1749년 8월, 오늘날 사라토프(펜자) 현에서 니콜라이 아파나시예비치 라디셰프와 표클라 스테파노브나 라디셰바 사이에서 장남으로 출생했다. 1756년 모스크바 대학이 설립되자 모스크바의 외삼촌 집으로 보내졌으며 외삼촌으로부터 처음 계몽주의적 사고를 접했다. 1762년 궁정 쿠데타로 예카테리나 2세가 집권하자 외갓집의 알선으로 예카테리나의 시종이 되었다. 이후 페테르부르크의 귀족 학교에 등록하여 학업을 병행했다. 이곳에서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 쿠투조프와 만나 교우 관계가 시작되었다. 예카테리나가 선발한 12명의 국비 유학생 가운데 하나가 되어 독일의 라이프치히 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가 1771년 봄에 다시 페테르부르크로 귀국했으며 입법부의 9등관이 되어 법률가로 봉직했다. 1772년 계몽주의자이자 저널리스트인 니콜라이 노비코프와 교우를 시작했다. 이후 입법부의 법률 사무직에 염증을 느껴 핀란드 사단의 무관(사단급 군검찰)으로 이직했다. 잡지 「화가」에 마블리의 『그리스 역사에 대한 명상』을 번역해서 발표했다. 푸가초프의 난이 발발하자 퇴직하여 자신의 영지로 귀향했다. 1777년 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와 A. R. 보론초프 백작의 추천으로 상무부에서 상업과 무역 관련 일을 담당했다. 1789년 『표도르 바실리예비치 우샤코프 생애전』을 출간했으며 1790년 『토볼스크의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페테르부르크에서 모스크바로의 여행』을 출간했다. 다소 급진적인 작품들로 예카테리나 여제의 분노를 산 라디셰프는 사형을 언도받았으나 이후 형량이 낮아져 시베리아로 유형을 떠났다. 1792년 『중국 무역에 관하여』를 출간, 1792년부터 1796년까지 『인간, 죽음, 불멸에 관하여』를 집필했으나 사후 출간되었다. 1796년 파벨 1세가 즉위하자 황제의 명으로 11월에 시베리아에서 귀환했다. 1801년 알렉산드르 1세가 즉위하고 이해 3월 라디셰프는 완전히 사면된다. 이후 황제의 명에 의해 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와 입법위원회의 위원으로 임명되었다가 1802년 사망했다.
『페테르부르크에서 모스크바로의 여행』은 라디셰프의 대표작으로, 혁명적 메시지로 인해 ‘거대한 고발장’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 작품이다. 이 작품을 읽은 예카테리나 2세는 격분한 나머지 “푸가초프보다 더 나쁜 놈”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오늘날 이 작품은 문학의 사회적 역할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 주는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역자

서광진

서울대학교 노어노문학과 학사 및 석사. 서울대학교 노어노문학과 박사 과정 수료. 모스크바국립대학 문학사학과 박사(박사 논문: 「18세기 말-19세기 초 러시아 문학 운동에 있어서의 라디셰프 산문」).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박사후연구원이었으며 현재 서울대학교, 서강대학교, 숭실대학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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