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는 형식이 아니라 듣는 형식의 연극
드라마가 아닌 오페라로 불리는 중국 전통극의 효시
을유세계문학전집 78번째 작품인 『원잡극선』은 중국 전통극 가운데 하나인 원나라 시대의 잡극이 수록된 작품집이다. 이 책에는 원곡 4대가로 꼽히는 관한경, 백박, 마치원을 비롯해 이호고, 석군보, 맹한경, 기군상, 정정옥 작가 등 원잡극을 대표하는 작가들의 작품이 실려 있다. 중국 문학사에서 한 시대와 그 시대를 대표하는 문학 장르를 지칭하여 전통적으로 “한문漢文(또는 한부漢賦), 당시唐詩, 송사宋詞, 원곡元曲”을 꼽는다. 여기서 ‘원나라의 곡’으로 불리는 원곡은 산곡과 잡극을 지칭한다. 산곡은 장단구의 서정 양식이고, 이 산곡을 엮어서 노래로 부르며 스토리를 전개하는 극 양식이 바로 잡극이다. 잡극은 원나라를 대표하는 문학 장르로 중국 고전문학사 후반기의 중요한 양식 가운데 하나이다. 원잡극을 포함한 중국 전통극은 서구극과는 다른 독특한 형식과 미를 가지고 있으며 일찍이 20세기 독일의 연극학자 베르톨트 브레히트에게도 영향을 미쳐 그가 주창한 유명한 서사극 이론에서 추구하는 연극적 실천 모델이 되기도 하였다.
이 책에 수록된 원잡극 작품은 크게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선비 장우가 바다를 끓이다」와 같은 애정극으로 보편적이면서 영원한 테마인 남녀 간의 사랑을 다룬 작품들이다. 두 번째는 「비바람 맞으며 화랑아 노래하다」와 같은 사회극으로 당시 중국의 시대상을 엿볼 수 있는 작품들이다. 세 번째는 『삼국지』에서 제갈공명과 주유의 지략 대결을 각색한 「강 건너에서 지략을 겨루다」와 같은 역사극이다. 마지막으로 「자린고비가 재산 임자를 사들이다」와 같은 종교극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이 밖에도 당 현종과 양귀비의 사랑과 이별을 다룬 작품으로 20세기 초 중국의 사상가이자 희곡학자인 왕궈웨이가 원잡극 최고의 예술적 문장이라고 극찬했던 「오동나무에 떨어지는 빗소리」, 과거 응시생 선비와 기녀 사이의 스캔들을 다룬 「곡강지의 꽃놀이」, 원잡극의 4대 비극 가운데 하나인 「두아의 억울함이 천지를 움직이다」, 남의 아내를 탐하여 살인을 저지른 악인에 대한 완성도 높은 수사극인 「인형을 조사하여 사건을 해결하다」, 청렴 강직한 포청천을 만날 수 있는 「포 대제 나리, 진주에서 쌀을 내다 팔다」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러한 작품들은 원 대 이전의 다른 문학 작품과 달리 선비가 상인에게 능멸을 당하고 대의명분보다 물질적 가치가 중시되는 등 변화된 가치관을 잘 반영하고 있으며 특히 사회적 약자인 여성에 대한 시각이 보다 능동적으로 다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송나라 이후 정치적으로뿐만 아니라 경제적, 사회적으로 총체적인 재편의 시기를 산 사회 기층 민중의 생활과 그들의 생각,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이러한 원잡극을 통해 우리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그 시기 범상한 민중들의 삶의 결 하나하나를 소상히 들여다볼 수 있다.
당 현종과 양귀비의 사랑, 청렴한 관리 포증의 활약
우유부단한 선비와 지혜롭고 현명한 기녀…
우스꽝스러운 악인을 비롯해 개성 만점의 등장인물들이 펼치는 중국식 오페라
원잡극은 노래와 말을 적절히 배합하여 각각의 기능과 효용을 극대화하여 구성한 음악극이다. 노래는 그 자체로 감상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서정시이고, 말로 하는 대사 또한 단순한 대화뿐만 아니라 적절한 운율이 섞인 시와 다른 운문이 섞여 있다. 그래서 이 책에 수록된 원잡극을 읽다 보면 잡극만의 독특한 리듬감을 느낄 수 있다. 아울러 동양적인 판타지를 만날 수 있다. 「선비 장우가 바다를 끓이다」에서는 인간과 신적 존재인 용왕의 딸 용녀와의 사랑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 작품은 초기 설정과 마무리, 그리고 바닷물을 끓이는 행위 등 작품 전체가 매우 제의적이면서도 판타지 같은 특징을 지니고 있다. 우리나라의 『장화홍련』을 연상시키는 「두아의 억울함이 천지를 움직이다」 역시 살인 누명을 뒤집어쓰고 억울하게 죽게 된 두아가 억울함을 호소하며 하늘과 땅에 저주를 내리고, 이 저주가 그대로 실현되는 장면, 후에 두아의 혼령이 등장하여 범인을 잡고 원혼을 씻는 모습에서 동양적 판타지를 볼 수 있다.
원잡극은 여러 다른 장르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중 하나가 바로 이번 작품집에 실려 있는 「조씨고아의 위대한 복수」이다. 이 작품은 장엄하고 비장미가 넘치는 비극으로 원잡극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이다. 작품 전체를 압도하는 도안고의 공포스런 위력, 한궐과 공손저구, 정영의 숭고한 희생, 자신의 출생 비밀 캐낸 결과 원수가 다름 아닌 자신을 누구보다 아끼는 양아버였다는 정발의 아이러니, 이러한 점들이 이 작품의 비극성을 고조시킨다. 이 작품은 18세기 경 유럽에 소개되어 원잡극 가운데 최초로 서양에 번역된 작품이며, 프랑스의 계몽사상가이자 작가인 볼테르가 「중국 고아L’orphelin de la Chine」라는 제목으로 번안하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여러 차례 우리 극단에 의해 무대에 올려졌고, 경극에서는 「고아를 수색하고 고아를 구출하다搜孤救孤」는 작품으로 재창조되어 중국인들이 매우 사랑하는 레퍼토리이다. 아울러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황제와 관리, 선비에서 시작해 고리대금업자, 돌팔이 의사, 동네 건달, 상인, 기녀에 이르기까지 온갖 다양한 직업군을 비롯해 선인과 악인, 충신과 배신자, 소인과 군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인물군상을 만날 수 있는 이 원잡극집은 오늘날 현대 독자들에게도 입체적이면서 생동감 넘치는 작품으로 오롯이 다가온다.
저자
관한경
관한경은 원잡극의 대표 작가 중 한 사람으로 원곡 4대가에 속하는 인물이다. 원곡 4대가에는 관한경 이외에도 왕실보, 백박, 마치원이 포함된다. 후기의 작가인 정광조와 교길을 포함해 원곡 6대가라 부르기도 한다. 특히 관한경은 작품을 집필하면서 동시에 연출을 하고 배역을 맡기도 했으며 여러 잡극 작가들과 친분을 쌓으며 왕성하게 활동해서 잡극을 융성하게 만든 공로자로 평가받는다.
역자
김우석
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졸업하여 동 대학원에서 석사 및 박사학위를 받고, 대구한의대학교(구 경산대학교) 조교수를 거쳐 현재 인하대학교 중국언어문화학과에서 교수로 재직 중이다. 중국의 연극과 민간신앙 및 민속에 대해 두루 관심을 갖고 있다. 주요 논저로는 「홍승洪昇의 ‘장생전長生殿’ 연구」, 「제궁조諸宮調 연구」, 「민간신 보권 연구」, 「중국 빗물질문화유산 보호사업에 관한 초보적 고찰」 등 논문과 『중국공연예술』(공저, 한국방송대출판부, 2008) 등이 있다.
역자
홍영림
연세대학교 중문과에서 중국 고전 희곡을 전공하여 석?박사 학위 취득. 현재는 극예술을 중심으로 중국 문화 전반에 관심을 갖고 있다. 대표 논문으로는 「원 잡극 삼국희의 구비문학성 연구」(석사 논문), 「명청대 화북 향촌극 연구」(박사 논문)이 있고, 소논문으로는 「중국 전통극 배우에 대한 연극학적 고찰」, 「신판 월극 ‘梁祝’의 개작 양상 연구」 등이 있다. 공저로는 『중국 근대의 풍경』(그린비, 2008), 공역서로는 『리위 희곡 이론』(보고사, 013), 『중국 고전극 읽기의 즐거움』(민속원, 2011)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