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만났던 느낌과는 다른, 진짜 헤세를 만나는 시간
소설가 배수아가 선별하고 번역한 헤세 산문집
그녀를 통해 새롭게 만나는 진짜 헤세
아마도 어쩌면 한국의 독자들 중에는 헤세를 주로 청소년에게 적합한 교양 소설의 저자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틀 속에 묶기에 작가 헤르만 헤세는 훨씬 더 다양하고 풍부한 모습을 갖추었으며, 시민사회적인 규범에 갇히기를 매우 직접적으로 거부하며 때로는 극단적일 정도로 개인주의와 개성을 강조해 온 작가이다. 그는 (…) 그 어떤 정해진 길도 거부하고 길 없는 길을 가는 독자적인 쾌락에 대해서, 오직 자신의 기질에 충실한 방식으로 행복을 찾는 삶에 대해서 고집스러울 만큼 즐겨 이야기한다. - 역자 후기 중에서
오래전 그땐 제대로 볼 수 없었던, 소설 뒤의 헤세를 만나다.
처음 만났을 때와는 다른 느낌의
때로는 삐딱하고, 때로는 인간미 넘치고, 때로는 미소 짓게 하는 진짜 헤세를.
“새는 알을 까고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고자 하는 자는 한 세계를 부숴야 한다”는 문구로 학창 시절의 우리를 흔들어 놓았던 헤세. 그리고 꽤 긴 시간이 흐른 뒤 다시 만난 그. 소설이 아닌, 그의 덤덤한 목소리를 통해 만난 헤세는 첫 느낌과는 많이 달랐다. 이 산문집에는 일상을 바라보는 무겁지 않은 상념부터 무언가를 깊이 들여다보는 그만의 독특한 생각까지, 헤세를 읽을 수 있는 헤세의 생각들이 있다. 그리고 세상에 대해 까칠하게 이야기하는 모습과 더불어 자신보다 좋은 내용의 우편물을 받는 이웃을 부러워하거나 사소한 것에 감동하는 인간 헤세가 있다. 스스로를 방랑자라고 칭한 그는 자신을 한곳에 남기지 않고 떠다녔다. 그러면서 떠돌던 그 곳과 그 속의 사람들, 그리고 그 자신을 글로 남겼다. 이제 글로 남겨진 헤세를 만날 시간이다.
역자는 이 산문집에 한 가지 주제에 편중하지 않고 다양한 산문들을 모았다. 산문집 『방랑』에 나온 산문들은 가장 유명하고 한국에도 소개됐으므로 헤세 독자라면 읽어 봤을 것들이지만, 아름다운 문장들의 강렬한 효과와 더불어 가장 ‘헤세적’인 특성을 갖춘 작품이라 「나무」, 「농가」, 「마을」 세 편을 수록했다. 그 밖에도 자연의 아름다움과 진정한 음미, 여행, 방랑에 관한 헤세의 빼어난 산문들을 넣었다. 헤세의 편지 글 중에서는 그의 독자적이고 고집스러운 정신세계를 잘 나타내는 내용들을 골라서 발췌했다. 헤세의 독자들이 흥미롭게 읽을 것으로 기대해, 그의 어린 시절을 말해 주는 「짧게 쓴 자서전」의 일부와 청년 시절의 사랑의 에피소드, 그리고 사랑과 열정의 기이한 일면을 다룬 글들도 선별하고, 여행과 무위에 대한 헤세의 사고가 직접적으로 들어 있는 글도 넣었다. 그의 인도 여행 산문집인 『인도에서』에 수록된 몇 편의 산문과 우화나 단편소설 형태의 글 몇 편과 그의 정치적 입장을 밝힌 글도 포함했다. 헤세는 음악에도 관심과 조예가 있었는데, 여기 수록된 글 중에도 음악을 다루는 작품들이 있다. 그리고 역자가 특히 좋아하는, 헤세 문학의 정수를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소설 장면 몇 개를 포함시켰다. 이렇게 선별한 글들을 네 개(헤세의 방랑, 헤세 그리고 사랑, 헤세가 본 사람들, 헤세의 생각)의 부로 나누어 구성했다. 이 산문집에는 이미 알려진 헤세의 시나 소설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헤세의 인간적인 모습과 생각을 볼 수 있고,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글이 다수 포함되어 있어 헤세 독자들에게 좋은 선물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저자
헤르만 헤세
1877년 독일의 칼브에서 태어난 헤세는 개신교 선교단에서 활동하는 부모 밑에서 자랐다. 1891년 신학교에 입학했으나 7개월 뒤 시인이 되기 위해 도망쳤고, 이듬해 자살을 기도했다. 이후 정신 요양원에 2개월여 입원했다가 바트 칸슈타트 김나지움에 입학하지만 1년여 만에 학업을 중단하고 시계 부품 공장에 수습공으로 들어가 2년 정도 일하다가 서점에서 약 4년간 근무했다. 1899년 첫 시집 『낭만적인 노래』와 산문집 『한밤중 뒤의 한 시간』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1904년 소설 『페터 카멘친트』로 일약 인기 작가가 되었다. 『수레바퀴 밑에』를 비롯해 1916년에는 헤세의 단편 소설 가운데 걸작으로 평가받는 「청춘은 아름다워」를 발표하며 작품을 꾸준히 출간했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자원입대했으나 복무 부적격 판정을 받고 1919년까지 스위스 베른의 독일 전쟁 포로 구호소에서 근무하며 전쟁 포로들을 위해 전쟁과 국수주의를 반대하는 정치 논문, 호소문, 공개서한 등을 국내외 신문과 잡지들에 계속 발표했다. 하지만 이로 인해 독일 문단과 국수주의자들에게 변절자로 몰려 정신적 타격을 입었다. 1919년 에밀 싱클레어라는 가명으로 출간한 『데미안』이 호평을 받았으며, 『요양객』, 『황야의 이리』, 『유리알 유희』 등을 계속 발표했다. 1946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이후에도 꾸준히 집필하며 작품을 선보이다가 1962년 생을 마감했다.
역자
배수아
1965년 서울에서 태어나 이화여대 화학과를 졸업했다. 1993년 『천구백팔십팔년의 어두운 방』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1990년대 한국소설의 새로운 문법을 개척한 작가로 인정받고 있으며 2003년 한국일보문학상, 2004년 동서문학상을 수상했다.
지은 책으로 소설집 『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 『바람인형』, 『심야통신』, 『그 사람의 첫사랑』, 장편소설 『랩소디 인 블루』, 『부주의한 사랑』, 『철수』, 『나는 이제 니가 지겨워』, 『일요일 스키야키 식당』, 『에세이스트의 책상』 등이 있다. 옮긴 책으로 『불안의 꽃』, 『나의 첫 번째 티셔츠』, 『어쩌면 그곳은 아름다울지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