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훔볼트의 대륙

Alexander von Humboldt, Reise nach Sudamerika

울리 쿨케 ,최윤영

252쪽, 185*220, 16,000원

2014년 05월 20일

ISBN. 978-89-324-7235-5 0

2014년 문화체육관광부 세종도서

이 도서의 판매처

“나는 열대지방을 위해 태어난 몸이다.”

그가 걸은 길은 지도가 되었고, 그가 남긴 기록은 역사가 되었다

브라질 월드컵이 열리는 남미 대륙을 실질적으로 ‘발명’한 훔볼트 이야기

 

독일의 자연과학자 알렉산더 폰 훔볼트는 남미를 비롯해 전 세계를 무대로 벌인 과학 탐사 활동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다윈의 비글 호 항해 이전에 훔볼트의 항해가 있었다”고 평가될 만큼, 과학 탐사에 있어서 한 획을 그은 것으로 평가받는 훔볼트는 인문학자로 유명한 그의 형, 빌헬름 폰 훔볼트와 더불어 독일의 대표적인 지성인으로 손꼽힌다. 남미 대륙을 탐험하며 서양인 최초로 신대륙을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방법으로 탐험하고 조사했던 그는 학문에 남긴 커다란 발자취에 비해 그간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편이다. 사실 훔볼트만큼 전 세계에 자신의 이름을 딴 지명이나 동물명, 혹은 식물명이나 기관명을 가진 사람도 드물다. 유일한 예외라면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정도이다. ‘훔볼트해류’나 ‘훔볼트펭귄’, ‘훔볼트대학’ 등에서 보이듯이 적어도 열아홉 종의 동물과 열다섯 종의 식물이 그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을 뿐만 아니라, 산맥, 봉우리, 공원, 광산, 항만, 호수 등에서도 그의 이름을 찾아볼 수 있다. 이 프로이센의 남작은 심지어 미국에까지 자신의 이름을 남겼는데, 그의 이름을 따서 지은 도시명이 여덟 곳이고 카운티는 아홉 곳이나 된다.

훔볼트는 19세기에 이미 유럽은 물론, 남미와 북미까지 포함해 활동했던 ‘글로벌 플레이어’였다. 당시에 그는 ‘걸어 다니는 대학’이란 별명으로 불릴 만큼 유럽 지성계에서는 알아주던 인사였다. 다방면에서 뛰어난 지식을 지니고 있었던 훔볼트를 가리켜 괴테는 이렇게 말할 정도였다. “아무도 능가할 수 없는 그 다방면의 지식이란! 그는 사람들이 그냥 통만 가져다 대면 항상 시원한 물을 끊임없이 콸콸 쏟아내는 수도관을 가진 우물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그는 콜럼버스에 의해 발견되었고, 피사로에 의해 약탈되었던 남미 대륙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유럽인에게 다시 소개한 인물이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발견을 넘어 오늘날 남아메리카를 ‘발명’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황금의 대륙이자 야만인의 땅이라는 환상과 각종 과학적 오류들을 깨고 남미 대륙의 거의 모든 것들을 사실에 입각하여 재조명해서 유럽 학계에 보고했다. 그는 자신이 찾아낸 동식물을 명명하는 한편, 여러 자연 현상에 자신의 이름이 붙기도 했다. 특히 남아메리카의 독립 전쟁을 이끌게 되는 시몬 볼리바르를 만나기도 했는데 훔볼트 전기를 저술한 마이어아비히에 따르면 “훔볼트는 볼리바르에게 용기를 주고 깊은 영향을 주어 그가 주어진 인생의 과제를 의식적으로 완수하도록 큰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적어도 오늘날 우리가 바라보는 남아메리카에 훔볼트만큼 직간접적으로 많은 영향을 미친 인물도 드물다.

저자는 훔볼트의 남미 탐험은 단순한 여정이라기보다는 과학적 조사가 이뤄진 거의 최초의 탐험이란 측면에서 여러 가지 의의를 지닌다고 말한다. 종래의 남미 탐험들이 황금과 보물을 노린 약탈이나 식민지 지배를 위한 지도 제작 등에 머물러 있었다면 그는 남미의 동식물 표본을 채취하고 스케치하며 기압계를 비롯한 당시의 최첨단 과학 기자재를 동원하여 각종 수치들을 측정했다. 그는 아메리카에서 6,200종의 식물을 수집했고 그중 3,600종은 그 당시까지만 해도 알려지지 않은 종류였다. 그가 탐험을 떠나기 전까지 학계에 알려진 식물은 대략 8,000여 종이었다. 훔볼트는 학계에 소개된 식물의 약 50퍼센트에 가까운 새로운 종을 혼자서 발견해 낸 것이다. 그 외에도 훔볼트는 700여 가지의 천문 관측을 했고 기압과 지구 자기장 측정도 상당히 많이 했다. 훔볼트는 자신이 경험했던 것들과 측정한 결과들을 6만여 쪽의 기록으로 남겼다. 5년 동안 그가 남아메리카와 북아메리카를 거쳐 탐험한 길은 대략 2만 5,000에서 3만 킬로미터에 달한다. 훔볼트의 지식욕과 탐구욕은 이처럼 끝이 없었다. 그는 왼손으로 풍뎅이를 잡으면 오른손으로 이미 미지의 난을 잡고 있는 종류의 사람이었다. 그로서는 항상 손이 많이 필요했다. 한마디로 그의 하루하루는 과학계의 새로운 발견으로 이어지는 나날이었다.

 

 

다윈의 비글 호 항해에 비견되는 19세기판 ‘정글의 법칙’

콜럼버스가 발견하고 피사로가 약탈한 대륙을 되찾다

 

훔볼트의 남미 탐험은 시작부터 끝까지 그 전 과정이 여러 사람들에게 알려진 것으로도 의의가 깊다. 그러다 보니 유럽에서는 그의 발걸음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었고, 그가 매번 보내오는 수많은 표본들은 과학계에 신선한 자극이 되었다. 개방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세계주의자 중의 한 사람이었던 훔볼트는 자신이 발견한 새로운 동식물의 표본을 다른 과학자가 먼저 연구해서 발표하는 것도 허락했다. 또한 그는 국적에 상관없이 존경을 받았다. 훔볼트는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를 대부 격으로 삼았고, 스페인의 카를로스 4세로부터는 스페인 식민지 전역을 마음껏 돌아다닐 수 있는 특별한 권리를 인정받았을 뿐만 아니라, 미국의 토머스 제퍼슨 대통령의 별장에 마음껏 출입할 수 있었다. 탐험 도중 영국의 나포선에 붙잡힌 적도 있었지만 곧 안전하게 풀려났으며, 식민지 지배와 노예제도를 비판한 탓에 제퍼슨 대통령이 그의 글의 유포를 금지하기도 했지만 둘 사이의 친밀한 관계는 변함이 없었다. 이처럼 유력 인사였지만 훔볼트는 자신이 발견한 해류에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붙이려 하자, 그 해류가 이미 해당 지역 사람들에게 오래전부터 익히 알려진 해류였다는 이유로 사양할 만큼 겸손한 인물이었다.

훔볼트는 황금의 땅, ‘엘도라도’의 근거지라 여겨지던 오리노코 강의 상류 지역을 탐험하여 그 같은 전설이 환상이었음을 입증했다. 또한 당시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알려졌던 침보라소 산을 별다른 안전 장비 없이 해발 5,881미터 부근까지 등정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고산병에 걸려 잇몸에서 피가 나기도 했지만, 훔볼트는 오히려 자신의 그러한 신체적 변화를 냉정하게 측정하고 기록했다. 그의 이 최고봉 등반 기록은 무려 50년 동안이나 깨지지 않았다. 그의 말년인 1855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슐라긴트바이트 형제가 카메트 산을 6,785미터까지 등정해서 그의 기록을 깼을 정도다. 오늘날 유명한 산악등반가 중에 한 사람인 라인홀트 메스너 역시 훔볼트가 등정했던 침보라소 산을 5,600미터까지 오르고 돌아서야만 했다. 그는 뛰어난 자연과학자였을 뿐만 아니라, 진정한 탐험가이자 모험가였다.

훔볼트는 이러한 세계 여행을 통해서 남다른 시각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미국이라는 신생 국가가 머지않아 세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리라는 것을 꿰뚫어 보았고,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파나마운하라는 아이디어를 내기도 했다. 이 책에는 이러한 훔볼트의 선구자적인 발자취뿐만 아니라 남미 탐험 여정에서 그가 남긴 기록과 당시의 스케치, 현재의 해당 사진들을 함께 수록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세계주의자이자 개방주의자이며 모험가이자 탐험가였던 훔볼트의 다양한 에피소드들이 실려 있다. 그는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당시 19세기를 풍미했던 위대한 인물들 중 하나임에 틀림없다. 적어도 지구라는 행성이 남아 있는 한, 그리고 인류가 존속하는 한, 우리는 세계 곳곳에서 그의 이름을 아주 오랫동안 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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훔볼트의 남아메리카 탐험 경로(지도)

1. 통나무배를 탄 남작
저술 작업
엘도라도

2. ‘지루함의 성’으로부터의 탈출
수확

3. 아메리카로 가는 별들 아래에서
남아메리카 탐험
위대한 이름

4. 새로운 세계에 도착해서
에메 봉플랑

5. 정글의 심장부로
훔볼트의 『코스모스』

6.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산’ 위로

7. 잉카, 황금의 흔적

8. 파리와 베를린의 스타
빌헬름 폰 훔볼트

역자 후기 - 19세기의 만능 글로벌 플레이어, 훔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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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울리 쿨케

울리 쿨케는 1952년 하노버에서 태어났고 베를린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했다. 언론인으로 베를린의 「타게스차이퉁Taz」 지와 뮌헨의 「나투어Natur」 기자로 일하다가 함부르크에서 발간하는 잡지 「마레Mare」의 편집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쿨케는 그 밖에도 「내셔널 지오그래픽 매거진National Geographic Magazine」, 「트란스아틀라틱Transatlantik」, 「쥐트도이체차이퉁Süddeutsche Zeitung」 같은 세계적인 혹은 독일을 대표하는 잡지와 신문에 정기적으로 에세이와 보도글을 기고하였다. 1999년부터는 매해 그해 최고의 르포와 보도에 수여하는 헨리 난넨Henri-Nannen상 심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2001년에 결혼하여 두 아이가 있으며 현재 독일의 저명한 「벨트WELT」 지 기자로 활약하고 있다. 쿨케는 주로 세계의 탐험 여행을 집중적으로 취재하고 이에 대한 저서를 여러 권 출판하였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훔볼트의 세계 여행에 흠뻑 매료되었으며 훔볼트 학교에 다닌 형들이 전해 주는 모험들을 들은 이후로 쿨케에게 훔볼트는 곧 원시림을 뜻하게 되었다.

역자

최윤영

서울대 독어독문학과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독일 본대학에서 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 독어독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독일 사실주의 소설, 현대 소설, 이민 문학과 비교 문학에 관한 논문을 다수 발표했다. 주요 저서로 『사실주의 소설의 침묵하는 주인공들』, 『한국문화를 쓴다』, 『서양문화를 쓴다』, 『카프카 유대인 몸』, 『민족의 통일과 다문화사회의 갈등』 등이 있으며 역서로 『에다』(공역), 『개인의 발견』, 『목욕탕』, 『영혼 없는 작가』, 『훔볼트의 대륙』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