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한지제로 난세를 읽는 안목을 배우고
후흑학으로 치세에 임하는 길을 익히다
천하를 놓고 초나라와 한나라가 다투던 초한지제의 시기는 여러 군웅이 등장했다가 사라지고 모략과 계략이 난무하던 난세의 전형에 해당한다. 인간의 오욕칠정이 모두 녹아서 용광로처럼 들끓던 이 시대는 영웅의 시대이면서 동시에 모리배의 시대였다. 그만큼 이 시기는 여러 소설과 영화와 같은 예술 장르에서 다뤄져 왔고, 이 시기를 분석한 각종 인문서나 리더십 책 등이 등장했다. 하지만 이 시기를 후흑학의 관점에서 체계적으로 다루고, 이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면면을 분석한 책은 지금껏 거의 없었다.
후흑학은 청말의 지사였던 리쭝우가 제창한 학설로 오늘날 중국판 마키아벨리즘이라 불리는데, 그가 쓴 『후흑학』은 당나라 중엽 조유의 『장단경長短經』, 명나라 말기 이탁오의 『분서焚書』와 더불어 중국의 3대 기서奇書에 속한다. 확실히 대의를 위해 필요하다면 적절히 계략과 술수를 부릴 줄도 알아야 한다는 사상은 마이카벨리즘과 유사한 면이 있다. 특히 이러한 사상이 ‘도’로 대변되는 공자의 사상을 중요시했던 중국 대륙에서 나왔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리쭝우는 춘추전국시대부터 초한지제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면밀히 분석한 결과 승자와 패자의 갈림길이 후흑에 있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후흑厚黑은 면후面厚와 심흑心黑을 합성한 말이다. 이는 대략 ‘뻔뻔함’과 ‘음흉함’이라 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후흑학을 뻔뻔함과 음흉함을 토대로 한 처세학 정도로 이해하고 있으나 이는 후흑학의 취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리쭝우가 역설한 후흑의 궁극적인 목적은 뛰어난 후흑으로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는 후흑구국厚黑救國에 있다.
저자는 초한지제에 등장하는 대표적인 인물인 항우, 유방, 장량, 한신, 진평, 범증, 여후, 소하, 괴철, 조참을 각각 면후와 심흑의 정도로 나눠 면후심흑面厚心黑, 면후심백面厚心白, 면박심흑面薄心黑, 면박심백面薄心白으로 살펴보고 있다. 이를 통해 독자들은 초한지제의 굵직굵직한 역사적 사건들과 이 사건들에서 보인 여러 인물들의 행보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다. 초한지로 일컬어지는 소설 속에서 전형화되었던 역사 속의 인물들을 후흑학의 관점으로 새롭게 풀이한 이 책은 초한지제의 시기를 좀 더 다각적이고 깊이 있게 들여다볼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다.
크게 깨달은 사람은 마치 어리석은 사람처럼 행동한다
총명해지기는 쉽지 않으나 어리석은 체하기는 더 어렵다
후흑의 반대되는 말은 박백薄白이다. 낯가죽을 두껍게 하고 검은 속마음을 숨기는 후흑과 달리 박백은 낯가죽이 얇아서 감정의 변화가 금세 드러나고 속마음 역시 하얘서 남들에게 들키고 마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박백의 극단에 속하는 면박심백을 대표하는 인물이 바로 항우이다. 항우는 진나라의 마지막 기둥이었던 장함의 대군을 격파하고 천하를 제패해서 초패왕에 오를 만큼 무략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하지만 귀족 자제 출신에 승승장구하던 그는 엘리트 의식에 젖어 난세에 필요한 후흑의 기술을 체득하지 못했고, 그 결과 자신의 의중을 뻔히 드러내 보이며 유방이 구사한 후흑술에 말려들어 속은 탓에 결국 천하를 내주고 말았다. 홍구를 중심으로 천하를 이등분해서 잠시 휴전하자고 한 뒤에 항우의 뒤를 친 유방의 모습은 후흑술의 진면모를 보여 준다. 이는 유방이 속마음을 알 수 없고 낯가죽도 두꺼운 면후심흑의 달인이란 사실을 일깨워 주는 일화다. 유방이 항우가 잠시 차지했던 천하를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면후심흑의 자세를 초지일관 유지했던 덕분이었다. 항우나 유방과 달리, 천하의 삼분의 일을 차지하고 한때 그들과 정족지세를 이루었던 한신은 젊었을 때 시비를 거는 남자들의 가랑이 사이를 지나갈 만큼 낯가죽이 두꺼운 인물이었으나 역시 유방의 심흑에는 당해낼 수 없었던 면후심백의 전형이었다. 항우의 유일한 책사였던 범증은 한신과 정반대되는 면박심흑을 대표한다. 홍문의 연회에서 유방을 제거하려 했을 만큼 범증은 계책과 음흉한 마음을 숨기는 데 능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반간계에 걸려 항우와 척을 지고 결국 그의 곁을 떠날 만큼 자신의 감정을 잘 숨기지 못하고 낯가죽이 얇은 면박을 보여 주었다. 만약 범증이 유방처럼 면후심흑에 능한 사람이었다면 그처럼 쉽사리 항우의 천하를 유방에게 다시 내주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항우와 범증, 그리고 한신의 연이은 실패 사례는 초한지제와 비슷한 무한 경쟁이 이뤄지고 있는 오늘날 시사하는 바가 크다. 특히나 거대 시장이자 G2의 일원으로 급부상한 중국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우리도 후흑을 배울 필요가 있다. 중국인들은 총명해지는 것도 쉽지 않으나 어리석은 체하는 것은 더 어렵다는 뜻의 난득호도難得糊塗의 모습을 자주 보인다. 중국인들이 보여 주는 이런 의뭉스러움은 모두 계산된 행동이다. 이들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우리도 그들이 지닌 후흑에 대해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저자
신동준
고전을 통해 세상을 보는 눈과 사람이 사는 길을 찾는 고전 연구가이자 평론가로 고전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탁월한 안목을 바탕으로 이를 현대화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경기고 재학 시절 한학의 대가인 청명 임창순 선생 밑에서 사서삼경과 『춘추좌전』, 『조선왕조실록』 등을 배웠으며, 서울대 정치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한 뒤 「조선일보」와 「한겨레신문」 등에서 10여 년간 정치부 기자로 활약했다. 1994년 다시 모교 박사 과정에 들어가 동양 정치사상을 전공했고, 일본의 도쿄대 동양문화연구소 객원연구원을 거쳐 「춘추전국시대 정치사상 비교연구」로 모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후흑학』, 『인물로 읽는 중국 현대사』, 『삼국지 군웅과 치도를 논하다』, 『조조 사람혁명』, 『팍스 시니카』, 『열국지 교양강의』, 『춘추전국의 영웅들』(전 3권), 『CEO의 삼국지』, 『조선의 왕과 신하, 부국강병을 논하다』, 『사마천의 부자경제학』 등이 있고, 역서로 『한 권으로 읽는 실록 초한지』, 『자치통감 삼국지』(전 2권), 『춘추좌전』(전 3권) 등이 있다.